< Previous056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이 중 투자지분이 유공 65%, 삼환기업 15%, 현대 10%, 석유개발공사 10%로, 절반 이상의 지분 을 확보한 유공이 한국 컨소시엄의 리더였다. 더욱이 이 시기가 유공이 미국의 코노코와 공동으로 인도네시아의 카리문 탐사에서 실패한 직후여서 석유개발 의지가 다소 꺾이던 시점이었다. 그럼 에도 최종현 선대회장은 한국 기업 중 최고 지분 투자를 결단하는 등 유공의 석유개발사업 의지를 다독여 나갔다. 다행히 투자 5개월 만에 마리브 광구 최초의 탐사시추선인 알리프 제1정에서 원유 발견에 성 공했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1984년 7월 어느 날, 최종현 선대회장의 집무실로 김항덕 당시 유공 사장이 사전 예고도, 노크도 없이 불쑥 들이닥쳤다. 그는 상기된 얼굴에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벌벌 떨며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헌트오일에서 올라온 일일 보고 서였다. “회, 회장님 터졌습니다. 초, 초대형입니다!” “왜 그리 호들갑이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리프 제1유정에서 석유가 나왔습니다. 매장량이 3~4억 배럴은 된다고 합니다.” “뭐라고, 억? 정말 억 단위야?” 김항덕 사장을 진정시키던 최종현 선대회장은 ‘억’이라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 는 그가 안절부절 못했다. 깊이 4,000m를 예정하고 시추를 시작했는데, 2,000m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석유가 나온 것이었다. 예상보다 빠른 결과였다. 그러나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만 확인했을 뿐, 아직 상업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다. 1984 년 12월, 최종현 선대회장은 석유개발사업에 대한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섣부른 희망을 경계 했다. “다행히 세 번째 도전만에 유전을 발견했지만, 너무 쉽게 발견하다 보니 남과 함께 석유탐사를 하는 것보다 독자적으로 해보고 싶은 생각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독자적으로 석유탐사를 추진할 경우 경험도 축적되지 않아 우선 리스크가 클 것이고, 또 석유탐사에 필요한 장비와 연구 팀 등 제반 요소를 다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다 갖추려면 회사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독으로 석유탐사에 진출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알리프 유정의 상업적 규모가 북예멘 정부에 의해 확인된 것은 시추정에서 석유가 발견된 지 16개월이 지난 1985년 11월이었다. 이후 개발정 시추와 생산시설 및 송유관 건설 등 개발작업을 완료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기까지 40개월이 소요됐다. 이는 석유개발사업에서 드물게 단 기간 내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1987년 12월 13일부터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1월 20일 유공해운 소속 Y위너스호가 35만 배럴을 싣고 울산항에 입항했다. 산유국의 꿈이 실현되는 가슴 벅찬 순간 이었다. 1988년 2월 8일, 최종현 선대회장은 그동안 석유개발사업에 관계해온 구성원들의 노고 를 위로하고, 북예멘 개발원유 도입을 기념하기 위해 자축연을 열었다. 057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해외 유전개발은 위험부담이 크고 성공률도 낮아서 상당한 운이 따라야 하는데, 우리가 2차로 시도한 북예멘 마리브 광구에서 원유개발에 성공한 것은 비단 운이 좋아서 만이 아니고 1980년 에 유공을 인수한 이후 종합에너지·종합석유화학기업을 장기 경영목표로 세우고 모든 구성원이 최선을 다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원유뿐만 아니라 석탄, 가스 등 관련 에너지사업이 본격화되고, 현 재 시공 중인 석유화학 프로젝트들이 완공되는 1991년에는 유공이 세계적인 종합에너지·종합석 유화학기업으로 변모할 것이다.” 마리브 유전은 확인 매장량이 10억 배럴에 달하는 초대형으로, 석유업계에서는 자이언트급으 로 불린다. 국내업체들이 탐사·개발·생산에 참여해 성공한 두 번째 유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전 규모나 개발수익 면에서 마리브 유전은 첫 번째 성공사례인 인도네시아 마두라 유전보다 더 크게 평가받고 있다. 마리브 유전은 이후 20년 동안 하루 10만 배럴의 원유를 뿜어 올리며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막 대한 공헌을 했다. 마리브 유전의 성공으로 유공은 석유개발 분야에서 일대 도약을 이루며 새로운 입지를 구축했다. 이는 한국 기업들 사이에 석유개발 붐을 일으켜 국내 석유개발사업의 활성화에 도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마리브 유전은 우리나라 경제의 국제수지 개선과 석유자원의 장기 적이고 안정적인 공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005. 석유에서 LPG·LNG로 에너지사업 다각화 종합에너지기업을 지향하는 유공은 1983년 석유개발사업 진출에 이어, 날로 급증하던 LPG 수요 에 대응해 LPG 저장소를 구축하고, 구미·청주 등지에 LPG공장을 건설하는 등 본격적인 종합에너 지 메이커로서 사업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LPG는 저급 탄화수소의 혼합물로서 주성분 함량에 따라 프로판과 부탄가스로 구분된다. 상온 상압에서 기체 상태의 LPG는 인위적으로 적당한 압력을 가하면 쉽게 액체상태가 돼 기상상태보 다 240~270배 부피가 줄어들기 때문에 수송과 저장이 용이하다. 완전 연소되는 데다, 냄새나 그 을음이 없는 클린 에너지로서 온도 조절이 쉽고 사용이 간편해서 가정용, 자동차용, 산업용 연료 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1964년 유공 울산 정유공장이 가동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LPG는 이후 갈수록 국 내 수요가 급증했으며, 더욱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폭발적인 증가 추세를 나타냈 다. 유공은 국내 수요에 대응해 1984년 6월, 수도권, 강원도, 충청권 일원의 안정적인 LPG 공급을 위해 인천 LPG저장소를 건설했다. 공사비 70억 원이 투입된 인천 LPG저장소는 2만 톤급 유조선 이 접안할 수 있는 돌핀 시설과 프로판·부탄을 저장할 수 있는 1만 5,000배럴의 탱크 5기를 갖추 었다. 058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청주도시가스 공장 준공식(1990.12.1) 유공가스 설립 기념식(1985.12.20)울산 LPG기지 저장탱크(1987.12) 059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인천 LPG 건설에 이어 1985년 12월 20일, 유공은 LPG 수입회사인 (주)유공가스를 설립했다. 유공은 LPG 도입사업을 단독으로 추진하려 했지만, 정부의 ‘제2의 LPG 공동수입회사 설립방침’ 에 따라 다른 정유사와 공동으로 유공가스를 출범시켰다. 출자 비율은 유공 55.6%, 호남정유 12%, 경인에너지 3%, 쌍용정유 12%, 극동정유 12%, 기타 석유 관련 8개사 5.4%였다. 대표이사 사장은 서효중 유공 부사장이 맡았다. 유공가스 설립과 함께 1985년 12월, 울산 LPG기지도 착공에 들어갔다. 1987년 12월 완공된 울 산 LPG기지는 지하 암반을 뚫어 만든 지하 공동 저장소로서, 공사비만 총 670억 원이 투입됐다. 총 50만 ㎡ 규모로 지하 공동 저장소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더욱이 같은 규모의 지상 냉동저 장 탱크에 비해 건설비, 운전비, 보수비가 훨씬 저렴하고, 안정성 면에서도 이점이 많았다. 이로써 유공은 인천저장소의 7만 5,000배럴과 울산기지의 365만 배럴을 포함한 372만 5,000 배럴의 LPG 저장능력을 갖춰, 이후 연간 700만 배럴 이상의 LPG 물량을 취급할 수 있었다. 유공은 1986년 3월, 구미도시가스를 설립하면서 LNG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공사비 70억 원을 투입, 1988년 12월 구미 1공단 내에 건설한 일산 73만 배럴 규모의 구미LNG는 2,110m의 주공급 배관을 설치하고 구미지역 각 산업체와 아파트에 LNG를 공급했다. 구미LNG에 이어 1986년 8월 청주도시가스를 설립했으며, 1990년 12월 포항도시가스 설립으 로 LNG 사업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공사비 80억 원을 투입, 청주 4공업단지 내에 건설한 일산 87만 6,000배럴 규모의 청주LNG도 30km의 주공급배관을 설치하고 청주지역 각 산업체와 가정 에 LNG를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포항도시가스도 공장 가동과 함께 포항공단과 포항시 일원에 가 정용, 산업용 LNG를 공급했다. 특히 유공은 구미, 청주, 포항지역 도시가스사업의 성공적 진출에 힘입어 1990년 1월, 국내 최 대의 도시가스회사인 대한도시가스의 지분 50%를 인수함으로써 경인지역 진출에도 성공했다. 국내 최대 LNG 사업자로 성장한 유공은 1992년 6월, 중부도시가스를 설립, 천안지역에도 LNG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060 “단언컨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 되어 있을 거야!” 1982년 12월 9일, 겨울 날씨치고는 햇살이 포근한 한때였 다. 격동의 한 해가 저물어가던 그날, 최종현 선대회장은 유 공 부·과장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소집했다. 유공 의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선경과 한가족이 되기 이전까지 유공은 20여 년 동안 합 작 파트너인 GULF가 단기 수익에만 치중한 나머지 미래에 대한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그러나 최종현 선대회장은 달 랐다. 민영화된 유공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해 깊은 고민 에 빠졌고, 심사숙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종합에너지 및 종합석유화학회사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회사와 함께 성장할 것인가에 대 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당시 유공 구성원들은 원유 수급 과 안정적 공급이라는 눈앞의 현실만을 직시했다. 유공이 장차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합에너지 및 종합석유화학회사 로 전환해야 한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오히려 방향전환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이 바로 최종현 회장이 부·과장급 간담회를 소집한 이유였다. 그날 그는, 참으로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해서 시간여행을 다녀온 사람처럼 30년 후의 유공의 모습을 알려주었다. 찬란하고 몽환적인 미래 이야기에서 30년 후 SK이노베이션의 실체를 예언한 것이었다. “아, 오늘은 여러분들 하고 우리 유공의 미래에 대해서 얘기해 볼 거야. 내가 단언컨데 유공이 60주년이 되는 해쯤이 되면 세 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 되어 있을 거야. 자, 그럼 그게 어 떻게 가능한지 같이 생각해 보자고. 2000년대 어느 시점에서 2010년 또는 2020년, 그보다 더 멀리 2030년을 기준으로 삼 아도 좋아. 그때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기틀을 잡아줘야 하는 거야. 바로 지금이 그 시작이지.” 2011년 1월 3일, SK이노베이션이 공식 출범했다.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루고, 전기차 배터리는 물론, 바이오 신약 까지 개발하는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BIG PICTURE061 이를 이미 30년 전에 내다봤던 최종현 선대회장의 혜안이 참으로 놀랍다. SK이노베이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 았다. 30년 전 미래를 설계한 이들의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 에 가능했다. “유공은 지금 석유정제를 하고 있지만, 석유에너지는 지하자원 으로 한계가 있고, 더욱이 공해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해. 물론 그 정유 사 업을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야. 앞으로 그 비중이 다른 에너 지사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져야 한다는 얘기지. 그럼 어떤 에너지사업을 해야 할까?” 선경이 유공을 인수한 지 겨우 2년 만에 최종현 선대회 장은 석유사업의 종말을 예언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 직계열화’를 천명하며 8년간 와신상담 끝에 정유사업 진출 에 성공했건만,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접을 생각부터 했으 니 유공의 구성원들도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0년 앞을 내다보고 일을 추진하는 빈틈없는 경영자로서,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했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신 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국제적 추세를 놓치지 않았고, 무엇보다 화석연료 고갈과 기후변화로 인한 기존 에너지 감축의 미래를 일찌감치 내다본 것이었다. “나는 유공이 그래서 중장기적으로 종합에너지기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 종합에너지에는 정유뿐만이 아니라, 석탄, 가 스, 전기, 태양에너지, 원자력, 에너지축적 배터리시스템 등이 포함되어야 하지. 이러한 모든 계획을 무리 없이 추진하기 위 해서는 기술을 축적해야 하고, 기술자를 양성하면서 기업의 방 향도 기술 집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지.” 최종현 선대회장의 염원과 예언은 비껴가지 않았다. SK 이노베이션은 여전히 정유사업을 영위하면서 다양한 에너 지 사업을 보유하고 있다. 석탄·가스 사업은 물론, 전기도 생산·판매하고, 태양광과 같은 신재생에너지사업도 운영 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기차 배터리까지 생산하는 종합에 너지기업으로 성장했다. 원자력만 빼고 최종현 선대회장의 종합에너지 염원을 모두 이뤄냈다. “이런 방향으로 10년 이상 계속 추진하면 양적으로는 물론, 질 적으로도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될 거야. 그걸 만드는 것은 사람 이고, 여러분들이지. 나는 여러분들과 SKMS가 있어서 틀림없 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 나는 정말로 여러분들이 자랑스럽고 고마워. 60주년이 되는 해에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해 볼 수 있 을 거야. 자, 그럼 함께 신나게 달려보자고. 어려워도 우리는 간 다!” SK이노베이션의 종합에너지 실현 배경에는 믿고 맡기 고, 그 믿음을 열정으로 불살랐던 그들만의 기업문화가 있 었다. 모든 구성원이 SK의 바이블인 SKMS를 실천하고, SUPEX추구로 무의식의 역량을 최대한 끄집어냄으로써 세 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062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03 정유사 혁신, R&D 경영으로 100년 기업 주춧돌을 놓다 GULF의 기술이전에 의존하던 유공은 1980년 선경을 만나면서 R&D 경영에 눈을 떴다. 1983년 울 산 정유공장 안에 유공기술지원연구소 설립을 시작으로 대전 등지에 연구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유 공은 선경그룹 전체의 종합연구단지 구축에 대한 얼개를 그리는 일도 주도했다. 유공의 울산연구소, 인천고분자연구소, 미주 동부 R&D센터와 선경인더스트리연구소, SKC중앙연구소, 선경건설연구소 등의 R&D 경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063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이 세상에 꾸준함보다 더 믿을 것은 없다. 신약 개발의 여정을 같이 걸어온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앞으로 SK그룹 바이오산업의 미래가 더 기대된다.” 2019년 11월, SK그룹의 제약·바이오 자회사인 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인 엑스코프 리(XCOPRI, 성분명: 세노바메이트)가 미국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신약 승인을 받았다. 이 소 식에 최태원 회장이 관계 구성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이 세상에 꾸준함보다 더 믿을 것은 없 다”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신약 개발은 힘들고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통상 10∼15년 의 기간과 1∼2조 원 이상의 비용이 투입되고도 5,000∼1만 개의 후보물질 중 1개 정도만 시판 가 능한 신약이 된다. 과감한 투자와 우수한 연구인력 확보도 중요하지만, 신약이 나올 때까지 십수 년간 실패를 용인하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만큼 바이오산업의 성공 여부는 최고 경영진의 의지와 리더십에 비례한 것이다. SK의 바이오 신화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프로젝트’를 만들면서 바이오산업을 시작 했다. 신약 산업 최전선인 미국 뉴저지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국내에도 별도의 연구팀을 구성하면 서 글로벌 선두기업 따라잡기에 나섰다. 006. R&D 산실, 유공 기술지원연구소 준공 선경을 만나기 이전 유공의 R&D 체계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혁신기술 개발보다는 석유메이저 GULF의 기술 습득에만 의존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62년 출범 당 시는 정유기술 담당이사가 기술 분야 조직을 이끌었다. 1970년 GULF가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 R&D가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고, 정유기술부문이 발족하면서 조직의 형태도 담당이사제에서 부 사장제 조직으로 상향 재편됐다. 1979년 정유 일변도에서 벗어나 기술 분야가 정유 및 화학으로 분리되는 등 세분화가 진행되기도 했다. 설립 이후 1980년대 초 민영화 이전까지 18년간 정유제품의 제조·판매로부터 시작해 윤활유, 석유화학 등의 분야까지 사업을 확대했지만, 제조기술은 외국 메이저 기업의 지원에 의존해 왔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외국 메이저의 기술이전 기피 등 기술보호 장벽이 높아짐에 따라 향후 전개될 국제화 시대의 생존전략 차원에서 자주적인 기술개발이 절대 과제로 떠올랐다. 1980년 선경을 만나면서 유공의 R&D에도 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유공은 ‘2000년대 세계 일류 종합에너지·종합화학기업 전환’이라는 장기 목표 아래 이를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R&D 부문의 투 자를 확대해 나갔다. 1983년 11월 울산 정유공장 내에 유공 기술지원연구소를 설립했다. 기술지원 연구소는 석유, 석유화학 및 윤활유 제품의 대고객 기술지원, 제품경쟁력 강화, 공장의 생산성 향 상 지원 등 기존 사업의 기술지원을 목적으로 출범했다. 064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울산 정유공장 내 들어선 유공 기술지원연구소 전경(1985.11.11) Memoir 60주년 추억담 독자기술 확보 혁신 과정에 동참한 소중한 기억 이성준 SK이노베이션 환경과학기술원장 ● “21세기 일류기업이 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선대회장님의 경영철학에 따라 SK이노베이션은 업계 최초로 1983년 기술지원연구소를 출범시켰고, 1985년에 울산에 연구소를 완 공하였습니다. 그 덕에 외국 선진기업들에 의존하던 정유, 석유화학 분야에서 독자기술을 확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대전 대덕연구단지로 이전하여 윤활기유, 아로마틱 촉매 및 리튬이온배터리 분리막(LiBS), 고성능 폴리 에틸렌(Nexlene), 그리고 SK바이오텍, SK루브리컨츠, SK온 등 자회사의 기술적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창립 60주년 을 맞아 그 혁신 과정에 참여한 기억이 소중한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환경과학기술원은 2050년 Net Zero 목표 달성 을 위해 미래 친환경사업에서 기술 리더의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할 겁니다. 배터리 금속회수(BMR), 플라스틱 리사이 클, 윤활유 업사이클 분야 등 자원순환 기술 분야를 상업화하고, 사업회사의 성공적인 Green Transformation을 지원 하겠습니다. 좀 더 장기적인 친환경 New Portfolio 작업 등 SK R&D의 행복한 100년 여정에 앞장서겠습니다.065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당시 새로운 경영체제로 기술개발부문을 스탭조직으로 개편하고, 이와 함께 기술개발부문에 공장기술지원(Factory Technical Service)과 시장기술지원(Marketing Technical Service)을 담당 하는 기술지원연구소를 신설했는데, 이 조직이 유공 기술지원연구소의 전신이었다. 연구소 건설사업도 추진했다. 1985년 3월 착공, 100억 원을 투입해 1985년 11월 11일 준공했다. 국내 정유업계 최초의 연구소인 기술지원연구소는 울산 정유공장 부지 내 1만 4,190㎡ 대지 위에 연구동 3동과 행정동 1동, 연건평 4,950㎡ 규모로 세워졌는데, 연구소의 기본설계 및 상세설계는 프랑스의 BEICIP사가, 건축설계는 건축연구소 원일이, 건설공사는 선경건설에서 담당했다. 유공 기술지원연구소는 85억 원의 예산을 들여 300여 종의 최신 연구장비를 갖추고, 이후 기 존의 석유·윤활유 제품의 품질개선 연구와 판매활동 및 고객에 대한 기술지원, 촉매제 및 원유의 평가, 신규 프로젝트 개발, 고급인력 양성 등의 연구사업을 수행했다. 신제품 개발과 첨단 신규사 업의 기술기반 조성을 위해 1987년 고분자 및 유기합성 연구기능, 1988년 신에너지 및 생물 연구 기능, 1989년 용제 연구기능, 1991년 가스기기 분야로 연구 범위도 확대해 나갔다. 1980년대 기술개발부문 체제는 당시 유공의 기술개발업무를 총괄하는 부문장을 중심으로 본 사 산하에 3개 부서를 두고, 전문 연구조직으로는 울산연구소(유공 기술지원연구소), 인천 고분자 연구소, 미주동부 R&D센터를 갖추었다. 본사 부서로는 기술개발부문의 스탭기능을 담당하는 기술개발부, 새로운 사업 분야 개발 및 시 장개발 업무를 수행하는 신기술사업개발부, 향후 R&D의 총본산 역할을 할 대덕연구소 설립을 위 한 업무 추진조직인 대덕종합연구소 설립준비팀을 두었다. 1989년 7월, 인천저유소 내에 설립된 인천 고분자연구소는 유공이 신규로 참여한 각종 폴리머사업의 국내외 품질경쟁 향상을 도모했 다. 고분자 합성으로부터 최종 제품가공 연구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는 연구활동을 통해 미래사 업 창출 및 사업기반 조성에 기여했다. 1989년 11월 설립된 미주동부 R&D센터는 현지 연구를 통 해 첨단기술 이전을 꺼려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선진기업과의 기술격차를 줄여 기업 의 국제화를 조기에 달성한다는 목적으로 출범했다. 현지 연구소의 강점을 활용해 재미 우수과학 자를 적극 유치하면서 고분자연구팀, 생물공학연구팀, 정밀화학연구팀에서 꾸준한 연구실적을 쌓 았으며, 1991년 뉴저지주의 페어필드(Fair field)로 연구소 건물을 이전했다. 007. 40년을 내다본 전기차 배터리 개발 1985년 정유업계 최초로 설립된 울산연구소는 기존 기술의 개량과 새로운 에너지 개발에 집중했 고, 특히 SK 배터리 개발의 산실로서 40년을 내다본 전기차 배터리 개발 역사의 초석을 다졌다. 선 경의 배터리 사업 역사는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터리 사업 도전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 은 최종현 선대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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