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026 PROLOGUE 경제 대국의 길, 에너지 Pioneer 1962-1979 부지로 뛰었다. 그마저도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1979년 12월 13일, 긴급회의에 모인 사장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굳어 있었다. 석유 때문에 모든 기업에 비상이 걸려 있었고, 부도 위기에 내몰린 기업도 적지 않았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시선은 말석에 앉아 있던 김창호에게 향했다. 그는 여전히 사우디 인맥을 연결하는 선경의 창구였다. “사우디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하루에 5만 배럴만 달라고 해.” 10대 1 판정승, 오일 유치능력에 승부 갈려 최종현 선대회장의 백지수표 발행은 유공 인수전의 공식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GULF의 철 수가 표면화되면서 바야흐로 유공 인수전이 본격화하고 있었다. 곧장 사우디로 달려간 김창호는 불과 이틀 만에 희소식을 전해왔다. 하루 5만 배럴을 확보했다는 소식이었다. 다만 사우디 국영 석 유회사 페트로민은 민간기업과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하며 선경이 정부 위임장을 가 져올 것을 요구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곧장 동력자원부 장관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석유 부족으로 난관 에 봉착한 정부 입장에게 대규모 원유 공급 가능성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격 동기에 민간에게 선뜻 국가 위임장을 발부할 만큼 배포를 가진 책임자가 없었다. 동력자원부는 대 한석유개발공사 같은 정부기관 차원의 공급계약을 요구했고, 사우디의 친구들은 ‘최종현 선대회 장이 아니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동력자원부가 위임장 발부를 계속 주저하자 최종현 선대회장은 대통령을 직접 만나 자초지종 을 설명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동력자원부와 협의하라’는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격동기에 권 한 없는 대통령의 공허한 울림이었다. 결국 위임장은 권력을 쥔 신군부 쪽에서 나왔다. 정보망을 통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신군부가 위임장 발부를 결정한 것이었다. 1980년 초, 최종현 선대회장이 위임장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점은 정부가 ‘석유조절 긴 급명령’을 발동할 때였다. 석유난에 허덕이는 국내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민간에게까지 원유확보 를 요구하던 때에 선경이 확보한 5만 배럴은 가뭄에 내린 단비였다.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새로운 권력자가 놓칠 리가 없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1980년 3월 19일 이한빈 경제부총리 명의의 위임장을 발부받아 페트로민 에 제출하고, 곧바로 계약을 체결했다. 3년간 하루 5만 배럴의 원유를 배럴당 24달러에 공급한다 는 내용이었다. 당시 현물시장 가격은 배럴당 42달러까지 폭등해 있었다. 특히 사우디는 당초 최 종현 선대회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약을 1월분까지 소급해서 적용했고, 몇 개월 후에는 5만 배럴을 추가로 공급했다. 선경이 거둔 성과에 비해 경쟁자들의 성과는 미미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석유조절 긴급명령’ 발동에도 불구하고 삼성물산, 남방개발 등의 성과는 1일 5,000배럴 수준에 그쳤다. 이런 가운데 유공 지분 50%를 확보하고 있던 GULF가 1980년 8월 전체 지분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정부가 027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방한 당시 최종현 선대회장의 초청으로 자택을 방문한 야마니 석유장관(1986.2.23) 시점내용 1962.11 33세의 최종현 선대회장 선경 합류 1973.5 일본 이토추·데이진과 일산 15만 배럴 정유공장 건설 합의 1973.7.1 선경석유주식회사 설립(현 SKC) 1973 1차 오일쇼크, 4차 중동전쟁 반발로 정유공장 합작 무산 최종현 선대회장 석유외교로 사우디 한국 원유공급 중단 해제 1975.1.1 최종현 선대회장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천명 1975사우디와 협력 강화. 연산 1만 톤 규모 플라스틱공장 건설 합작(사우디 내부 사장으로 무산) 1977.10 사우디 야마니 석유장관 최종현 선대회장 초청, 원유공급 백지수표 암묵적 합의 1978 이란발 2차 오일쇼크 최종현 선대회장 극비리에 자신을 팀장으로 하는 ‘유공인수TF팀’ 구성(손길승, 김항덕 팀원으로) 1979이란 팔레비 왕정 몰락, 석유수출 중단 발표 1979.12.13 선경 긴급 사장단 회의 소집, 사우디에 일산 5만 배럴 원유공급 요청 1980.3.15 정부 ‘석유수급 조정명령’ 발동 1980.3.19 정부 위임장 발부로 선경 사우디로부터 하루 5만 배럴 원유 확보(경쟁사들은 5,000배럴 확보에 그쳐) 1980. 초선경 ‘알 사우디 은행’으로부터 오일머니 1억 달러 유치 성공 1980.8GULF 전체 지분 매각 발표 1980.10 정부 유공 민영화 방침 발표(정부 주요방침: ①원유확보 능력 ②오일머니 유치능력) 1980.11.28 정부 유공 인수자로 선정 발표 선경의 유공 인수 과정028 PROLOGUE 경제 대국의 길, 에너지 Pioneer 1962-1979 지분을 인수하기에는 재정이 충분치 않은 데다, 국영기업의 관료적 행태로는 원유의 안정 공급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1980년 10월 민영화 방침을 최종 결정했다. 민영화 방침에서 정부가 내건 조건은 ①원유의 장기적·안정적 확보 능력 ②산유국 투자 유치 능력 ③산유국과 교섭 능력 ④증설·비축사업을 계획 기간에 완료 가능한 자금조달 능력 ⑤경영관 리 능력 등이었다. 산유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2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며 안정적 인 원유 공급선의 중요성을 절감한 때문이었다. 유공 인수는 재계 판도를 뒤흔드는 중대 사건이었다. 국내기업 최초로 매출액 1조 원을 돌파한 유일한 기업이었던 만큼 누가 인수하느냐에 따라 재계 판도가 뒤바뀔 수 있었다. 이 황금알을 낳 는 거위 사냥에 선경을 비롯해 삼성, 남방개발, 현대, 효성, 동아건설, 대한항공, 코오롱 등이 뛰어 들었다. 이 중에서 최종 라운드에 오른 기업은 선경, 삼성, 남방개발이었다. 승부의 관건은 원유 도 입과 오일머니 조달 능력이었다. 원유 도입에서는 이미 승부가 갈렸다. 5만 배럴에서 5,000배럴 로 선경이 경쟁자들보다 10배나 앞섰다. 오일머니 조달에서도 선경은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알 사우디 은행’을 통해 1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올 수 있었다. 유공 인수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자금 문제를 ‘오일머니’로 해결한 것이었다. 당시 최종현 선대회장의 차관 주선은 정부 당국자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차관 도입 당시 정 부 외환보유액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고, 정부가 직접 나서 차관을 도입하러 해도 한국 정 세 불안으로 차관을 주겠다는 나라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민간인 최종현 선대회장이 사우디 친분 을 배경으로 1억 달러의 차관을 들여온 것이었다. 결국 정부는 원유확보와 자금조달 측면에서 가장 뛰어났던 선경을 유공 인수 주체로 최종 결 정했다. 철저한 사전예측과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던 만큼 선경의 유공 인수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를 두고 일부 ‘특혜’라든가 ‘로비의 결과’라고 폄훼하는 것이나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고 비꼬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었다. 유공 인수로 재계 순위가 10위에서 5위로 껑충 뛰었다고는 하나, 선경은 엄연히 떡잎부터 다른 고래의 혈족이었다. 그 고래가 원대한 꿈을 찾아 고래들의 고장 울산 장생포에 입성했다. 지난 10년간 와신상담했던 고래가 마침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실력으로 쟁쟁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잠자던 거대 공룡 유공을 혁신의 무대로 이끌어낸 것이었다. “선경이 유공의 경영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최종현 선대회장의 전략이 좋았고, 당시 손길승 실장이 국내팀에 대한 전술책임자로서 전술을 잘 짰기 때문이다. 나 또한 중동사람 들의 사고방식, 행동방식을 잘 알고 있었고, 정부의 행정에 대한 예측이나 이에 대한 대처 방안에 밝았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만나서 회의를 열었다. 낮에는 갈라져 각자 일을 하고 들어와서 저 녁에는 또 회의를 했다. 유공 인수는 이러한 팀제의 효과가 극대화되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김항덕 전 SK 회장대우 상임고문, 월간조선 인터뷰, 2002)029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당초 신군부 내에서는 삼성이 유공을 인수하게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갑자기 최종현 선대 회장이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에서 기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사실 안 줄 것 같 아서 문제였지, 사우디에서 우리한테 안정적으로 원유를 주겠다고만 하면 사우디가 훨씬 좋은 상 대국이었다. 삼성이 선을 댔던 멕시코는 좌파 세력이 정권을 쥐고 있었다. 선경이 사우디, 삼성이 멕시코에 선을 댄 것이 승패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 월간조선 인터뷰, 2010.3) “이란의 석유수출 중단을 기폭제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이는 사실상 ‘정부 대 정부’의 관계 로는 석유 수입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도 ‘민간 대 민간’ 베이스로 전환 해야 하는 국면을 맞게 됐다. 미리 준비해온 최 회장의 SK가 인수하게 된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이승윤 전 부총리, <최종현, 그가 있어 행복했다>, FKI미디어, 2008) “배럴당 12달러이던 원유가 불과 3개월 사이에 34달러까지 치솟아 원유 장기 공급계약은커녕 배 한 척 분량의 스팟 계약조차 어렵던 상황에서 수많은 한국기업들의 급조된 노력은 불발로 끝났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예외를 이끌어낸 유일한 회사가 선경이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까지 나서서 직접 중동지역을 순방하면서도 끌어내지 못한 것이었기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동성, <SK그룹의 SUPEX>, 1999) 대한민국의 꿈, 에너지 안보는 경제강국 핵심 “에너지 전환기를 맞아 탄소중립을 한국 경제의 도약으로 생각했던 기업들은 부담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에너지 원자재 가격이 급변하고 공급에도 차질을 빚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에너지 안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최태원 회장, ‘에너지 전환과 탄소중립 정책 세미나’, 2022.6.29) ‘에너지 안보’에 관한 걱정은 60년 전에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1961년 5월 16일, 혁명의 기치 를 내걸고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야심 차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지만, 국내 산업의 혈관 은 꽉 막혀 있었다. 정유시설이 없어 원유가 아닌 값비싼 완제품을 수입하던 시절이었다. 언제 끊 길지 모를 원조 석유 의존에 전전긍긍하면서 갈수록 외화 부담이 가중됐고, 자연히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은 경제자립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긴급 수혈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030 PROLOGUE 경제 대국의 길, 에너지 Pioneer 1962-1979 혁명의 시대, 석유의 운명 석유(Petroleum)는 그리스어 Petra(바위 또는 돌)와 라틴어 Oleum(기름)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2000년 고대 이집트인들이 윤활유·약제로 사용했으며, 구약성서에도 그 사용법이 등장하는 것으 로 보아 석유의 출현은 가히 선사시대 급이라 할 수 있다. 석유의 한반도 진출은 조선왕조실록 중 종실록 편에서 찾을 수 있고, 실제 연료 자원으로 사용한 것은 구한말 편찬된 황현의 <매천야록> 의 경우 1880년(경진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부터 미국, 영국, 일본계 석유회사가 한반도에 진출했으나, 1920년대부터 일제가 석유자원을 군수물자화 하면서 사업성이 떨어지자 외국계 회 사들이 철수를 서둘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유시설은 일제가 설립한 조선석유주식회사의 원산 정유공장이었다. 우리나 라 정유사업의 효시로, 하루 8,000배럴의 원유처리 능력을 보유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일제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울산으로 정유시설을 이동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아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광복을 맞아 석유 공급은 미군정 시절 석유배급대행사인 PDA가 담당하다가, 대 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1월, 대한석유저장회사(KOSCO)가 설립되면서 국내 석유 공급 을 담당했다. 이후 미국, 영국계 석유회사가 다시 돌아왔지만, 원조에 의존하던 시절 석유는 아직 일상생활과 거리가 멀었다. 정부는 석유 자급을 목표로 일본이 만들다만 울산의 정유공장을 완공하려고 했다. 그러나 6.25 전쟁과 4.19, 5.16 등 격동기가 겹치면서 정유공장 건설이 무산됐다. 꺼진 불씨를 다시 되살린 건 군사정권이었다. 1961년 정부는 국력 배양과 국민생활의 향상을 위해 종합적인 국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주요 정책은 ①자립경제체제의 확립과 공업생산기반의 확충 ②생산시 설의 근대화 ③수입대체산업의 육성 ④고도성장 기반으로서의 수출산업 개발 육성 ⑤중소기업 지원의 다각화 등이었다. 특히 정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석유에너지의 안정 공급이 필요하다 고 판단하고, 국가경제의 기간산업으로서뿐만 아니라 수입 대체산업으로서 정유공장 건설을 최우 선 과제로 설정했다. 선경을 만나 유공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졌지만, 실제 우리나라 최초 정유회사의 명칭은 대한석 유공사였다. 1962년 들어 대한석유공사 설립 법안을 마련하고, 이어서 미국 UOP와 기술용역계 약을 체결하는 등 공장 건설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 후 제반 법적 절차를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정유회사인 대한석유공사가 창립된 것은 1962년 10월 13일이었다. 우리나라는 대한석유공사의 출범으로 고도의 자본 및 기술집약의 정유사업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산업의 쌀 석유화학으로 전진 정유공장 건설 과정은 쉽지 않았다. 미국 FLOUR와 정유공장 건설계약을 체결하고 1963년 3월 2 일 착공에 들어갔지만, 온갖 난관에 부딪쳤다. 경험과 기술 부족에 따른 혼선에다 방대한 규모의 031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투자사업으로 이내 자금난에 시달렸다. 기사회생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고심 끝에 정부는 당초 계 획했던 국내 자본에 의한 정유회사의 독자 운영을 포기했다. 자금조달이 시급했던 만큼 공동 운영 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파트너 선정 과정에서 선진 정유기술 습득이란 효과도 함께 노렸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구애에 석유 메이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미국 5대 석유회사(Shell·ESSO· Mobil·Caltex·GULF)를 상대로 교섭을 시도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는 기업이 없었다. 격동기가 반복되던 한국은 이미 투자기피 대상이었다. 더구나 보수적 성향의 미국 석유사들의 눈에 군사정 권의 출현은 더욱 투자불안을 야기시켰다. 몇몇 메이저가 소극적인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과도한 경영참여 등 무리한 조건을 제시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GULF의 조건이 양호했다. 25% 지분 참여에 장기 저리 차관 제공을 제시했다. 효율적인 자금조달과 경영권 확보를 높이 평가한 정부는 1963년 6월 GULF를 파트너로 받아들였 다. 대한민국 투자기업 1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GULF의 참여로 정유공장 건설은 가속 페달을 밟았다. 1963년 12월 13일 준공에 이어, 이듬해인 1964년 2월 13일 시운전을 진행했으며, 곧이어 4월 1일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경제개발에 긴급 수혈을 담당했던 대한석유공사는 고도 경제성장에 힘입어 1968년 1월 제2 정 유시설을 완공함으로써 일산 11만 5,000배럴의 원유처리 능력을 갖춘 국제단위의 정유공장으로 발돋움했다. 대한석유공사의 성장과 함께 국내 정유산업도 발전을 거듭했다. 석유류 제품의 수요 가 급격히 늘어나자 정부는 원유공급선 다변화를 목적으로 각각 일산 6만 배럴 규모의 호남정유 여천공장(1967, 현 GS칼텍스), 경인에너지 인천공장(1968, 현 SK인천석유화학) 건설을 허가했다. 이로써 국내 석유업계는 이른바 정유3사 시대를 맞이했다. 정유산업 중흥에 힘입어 대한민국 에너지 안보의 꿈은 석유화학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67년 7월 정부는 정유공장이 있던 울산을 석유화학공업단지로 결정하고 10개 계열공장의 실수 요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석유화학공업의 핵심 부분인 나프타 분해시설의 실수요자로 대한석유 공사를 지정했다. 그러나 석유화학산업 기초재료인 나프타 분해시설의 건설은 막대한 자금이 소 요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자금조달에 쫓기던 정부는 또 한 번의 혁신적인 돌파구를 고안해냈다. GULF의 투자 유도를 위해 대한석유공사 경영권의 과감한 포기를 결심했다. 지분 50%를 인수하 고 대규모 차관을 조달하는 대가로 경영권을 GULF에 이양했다. 그 결과 1970년 1월 1일 「대한석유공사법」이 폐지되고, 정부 지분을 한국산업은행이 인수함으 로써 대한석유공사는 정부투자기관에서 상법상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이는 외국자본 경영에 의 한 시장경제체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GULF의 자금조달로 1972년 10월 석유화학의 핵심 인 나프타 분해시설이 마침내 완공을 보았다. 석유화학공업 진전과 함께 대한석유공사의 또 하나 성과는 훗날 혁신의 아이콘 SK루브르컨츠 태동의 씨앗이 되는 윤활유사업 진출이었다. 대한석유공사의 윤활유사업 진출 이전 국내 시장은 저급 제품이 맹위를 떨쳤다. 국내에서 석유류의 저장 배급과 판매를 담당했던 KOSCO가 윤활유도 032 PROLOGUE 경제 대국의 길, 에너지 Pioneer 1962-1979 GULF와의 국내 정유공장 설립 협정체결식(1963.6)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공장 준공식(1964.5.7) GULF의 자금조달로 완공된 나프타 분해시설(1972.10)033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도입, 판매를 대행했다. 그러다 1960년대 초 미군이 윤활유 공급을 중단하자 소위 ‘모빌유’라고 불 리던 저급 제품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극동정유(1961, 현 현대정유), 대한정유(1963) 등 5개 윤활유 제조회사가 설립되던 시장 형성기였으나, 이들 회사가 제조한 제품 역시 저품질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한석유공사는 출범과 함께 산업발전의 윤활유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1963년부터 윤활유사업 을 시작했다. 먼저 GULF로부터 고급 제품을 도입, 국내에 판매했다. GULF 제품은 시판과 함께 빅 히트를 쳤다. 특히 1968년부터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대역사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GULF 제품만이 고속도로 건설장비의 성능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 대한석유공사는 고급 제품 수입에 만족하지 않고 본격적인 국산화에 나섰다. 1968년 12월 24 일 일산 550배럴의 윤활유배합공장을 준공했다. 이로써 대한석유공사는 국내 최초로 고급 윤활 유를 생산하게 되면서 국내 윤활유산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 매년 윤활유 생산량이 30% 이상의 증가율을 기록하면서 국내 산업발전에 기여했다. 시설 규모도 1980년 3월 일산 2,000 배럴로 확장되면서 국내 생산능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윤활유공장으로 발전했다. 더욱이 GULF와의 기술지원계약에 따라 선진공업국 수준의 제품배합 기술 및 첨가제 사용, 필수 규격 등 을 획득하면서 향후 독자 윤활유 기술개발에 필요한 기반을 확보했다. 굿바이 GULF, 공룡의 변신 두 차례의 석유파동에도 불구하고 석유류 제품 수요는 꾸준히 늘어났고, 국내 정유시설 능력도 크 게 확충됐다. 1970년 하루 처리량 22만 배럴에서 1978년 58만 배럴로 성장했다. 이 중 대한석유 공사는 1978년까지 28만 배럴을 확보하는 등 1970년대 내내 시장점유율 50% 이상으로 석유시 장을 선도했다. 업계 리더로서 대한석유공사는 비정상적인 시장경쟁을 지양하고 석유시장 안정 에 앞장섰다. 계속적인 수요 증가에 쌍용정유(현 S-OIL)가 정유사업 막차에 편승하면서 정유4사 체제가 갖춰졌다. 쌍용정유 온산공장 준공과 호남정유 확장으로 1980년대 초 국내 원유처리 능 력은 79만 배럴에 이르렀다. 온산 지역은 유공 인수 이전 선경이 선택했던 최적의 석유사업 부지 로, 최종현 선대회장의 남다른 예지력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두 차례 오일쇼크는 대한석유공사 역사에서 큰 시련이었고, GULF의 투자 의지에도 제동을 걸었다. 1970년대 1·2차 오일쇼크는 우리나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데 이어, 정유사업 운 영에도 상당한 압박을 가져왔다. 원유가 폭등과 원유 의존도 심화는 국내 경제의 부담 증가로 이 어졌고, 정유산업의 운영 및 손익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초래했다. 빈번한 석유류 제품 가격 인상에도 불구하고 원가 상승 요인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해 이 시기 대한석유공사는 4차례에 걸쳐 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영성과가 악화됐다. 더구나 1970년대 말 정 부의 시장 개입으로 적정이윤 개념이 사라졌다. 정부는 대한석유공사의 손익분기점에서 석유류 가격을 조정했다. 이는 GULF가 철수를 서두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034 PROLOGUE 경제 대국의 길, 에너지 Pioneer 1962-1979 1980년 8월 19일, GULF는 지분주식 50%에 대한 대가로 9,300만 달러를 수령하고 철수했다. GULF가 철수한 이유는 미래 비전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석유 유통시장이 변하고 있었다. 석유 메이저 시대가 가고, 산유국이 직접 거래에 개입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민간기업과의 거래를 선호했다. 이때 이미 선경은 원유도입 능력에서 GULF를 압도했다. GULF가 원유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사이 선경은 무려 하루 5만 배럴이나 유치해낸 것이었다. 결국 비전을 못 찾은 GULF가 한국에서 의 철수를 선택했다. GULF의 철수는 외국자본과 외국기술에 크게 의존해 왔던 우리나라 경제가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시대적 전환점이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혁명의 시대에 태동한 석유의 혁신이 이제 민간기업의 역할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 적임자가 앞 선 전략과 오랜 세월 준비된 선경이었고, 선경의 강력한 혁신체제 가동과 함께 민간기업으로 체질 개선에 나선 거대 공룡 유공의 에너지 안보가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시점내용 1962.7 대한석유공사 법안 최고회의 통과 1962.10 자본금 25억 원으로 유공 설립 1962.10 외자 1,600만 달러, 내자 3억 5,000만 원으로 유공 건설계약 1963.3 정유공장 건설공사 착공 1963.7 GULF와 2,000만 달러 차관도입 협정체결 1963.12 3만 5,000배럴 정유공장 준공 1964.4 정유공장 정상가동 개시 1965.5 한국군에 대한 군납 실시 1967.5 5만 5,000배럴 1차 확장공사 완공 1968.4 6만 배럴 2차 확정공사 완공 1970.8 증자 조건으로 유공 경영권 GULF에 양도 1973.1 3차 확장공사 완공 1976.7 한국산업은행 소유 유공 주식을 대한석유회사에 매각, 주식 일부를 일반 공개 1976.12 4차 확장공사 완공 1978.3 나프타 분해시설 확장공사 완공(에틸렌 기준 연 15만 5,000톤) 1980.3 윤활유 배합시설 확장공사 완공(일산 2,000배럴) 1980.8GULF의 철수에 따라 대한석유지주주식회사가 주식 지분 50% 인수 1980.11.28 정부의 유공 민영화 방침에 따라 선경이 유공을 인수(동력자원부장관 발표) 선경합류 이전 대한석유공사 18년 주요 연혁035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GULF 철수와 정부의 시장개입을 초래한 1, 2차 오일쇼크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