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KEYWORD HISTORY 1962 20222022020 PROLOGUE 경제 대국의 길, 에너지 Pioneer GULF의 철수는 외국자본과 외국기술에 크게 의존해 왔던 우리나라 경제가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시 대적 전환점이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혁명의 시대 태동한 석유의 혁신이 이제 민간기 업의 역할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 적임자가 앞선 전략과 오랜 세월 준비된 선경이었고, 선경의 강력한 혁신체제 가동과 함께 민간기업으로 체질개선에 나선 거대 공룡 유공의 에너지 안보가 새로운 시험 대에 올랐다. 1962 1979021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에너지 안보, 선경의 꿈이자 대한민국의 꿈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 지성사, 1980) 1980년 늦가을, 동트기 직전의 칠흑 같은 암흑에서 희망을 좇는 이들이 있었다. 2차 오일쇼크 로 불황이 장기화하고, 더구나 국내 정치마저 격동을 반복하던 시절이었다. “유공 인수자로 선경그룹이 최종 확정됐음을 발표한다. 선경이 우리나라 종합상사로서 처음으 로 상당량의 원유를 공급했고, 앞으로도 원유 추가 확보 잠재력이 있으며, 산유국과 친분도 두터 운 점 등 오일머니 유치 능력이 크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1980년 11월 28일, 정부의 유공 인수자 선정 발표에 선경그룹 임직원들은 환호했다. 10년 숙원 을 이뤄낸 뚝심의 총수 최종현 선대회장은 좌청룡 우백호 같은 든든한 사업 동반자인 임직원들과 함께 두 팔 번쩍 치켜들고 감격했다. “국가경제에 혈액을 공급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비장한 각오로 유공 경영에 임하겠다. 기업이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유공은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공공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공기업의 자세를 철저히 갖추도록 하겠다. 유공을 세계에서 가장 효율이 높은 정유회사로 만들겠다.” (최종현 선대회장, 유공 인수 직후 기자회견, 1980.12.23) 유공은 포스코보다 먼저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단위 국가인프라기업이었다. 하지만 이를 인수한 최종현 선대회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단한 각오를 펼쳤다. 오늘날까지 혁신 60년사 를 쓴 SK이노베이션의 양대 혁신 DNA, ‘빅 픽처(Big Picture)’와 ‘딥 체인지(Deep Change)’는 이때 부터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선경직물 창업 이후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장기적인 ‘빅 픽 처’ 아래 유공을 인수한 선경은 정유사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정유업의 성장에 기본적 한 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이를 위해 ‘정유회사에 무슨 연구소가 필요하 냐’는 세간의 우려가 무색하게 정유업계 최초로 대규모 연구개발 싱크탱크를 구축했다. 윤활기유, 배터리 등 관련 비즈니스 다각화의 첨병 노릇을 해 왔다. 최태원 회장은 지속가능 성장이란 비전으로 ‘딥 체인지’를 내걸고 SK이노베이션을 ESG 시대를 선도하는 그린 에너지 글로벌 선도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기후위기와 탄소중립, 우크라이나 전 쟁, 자원 무기화 등 에너지 공급망 위기는 60년 전보다 심해졌다. 최종현 선대회장이 ‘석유에서 섬 유까지’라는 그림을 설계하고 준비하면서 그리고 유공을 인수하며 다짐했던 에너지 안보에 대한 사명감을 SK이노베이션으로 하여금 되새기게 한다. 022 PROLOGUE 경제 대국의 길, 에너지 Pioneer 1962-1979 선경의 꿈, 석유는 혁신의 시작 1980년 당시 박봉환 동력자원부 장관의 선경 인수 발표에 재계가 술렁였다. 당시 유공은 유일하 게 연 매출 1조 원을 넘는 국내 최대 기업이었다. 삼성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일제히 유공 인수 전에 뛰어들었다. 선경은 재계 순위로 따지면 명함을 내밀 처지가 못됐다. 선경이 최종 승자가 되 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경이 유공을 인수하자 특혜 시비가 불거졌다. 세간에는 ‘새 우가 고래를 집어삼켰다’는 비아냥과 뒤탈을 염려하는 시기 어린 유언비어도 난무했다. ‘선경이 자 신보다 수백 배나 큰 유공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일각의 회의론이었다. 고래의 꿈 그로부터 25년 뒤 나온 <슈퍼 엑설런트!: SK무한성장의 비밀 최종현 마인드(최준영·박영출·유회 경·노윤정 공동 저서, 2005)>라는 분석서를 보면 이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선경의 유공 인수 과 정을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법’이라고 역설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새우가 고래를 삼킬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석유왕을 뽑는 유공 인수전은 고래들의 싸움이었다. 힘과 덩치를 앞세운 고래도 있었 지만 앞선 전략으로 오랜 세월 준비한 고래가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달콤한 열매를 수확했을 뿐이 었다. 준비된 자만이 고래를 삼킬 수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10년의 장기계획을 세워 석유사업을 진두지휘한 최종현 선대회장의 지략이 빛났다. 그의 곁에는 좌길승(손길승), 우항덕(김항덕)이라는 든든한 전략가가 있었다. 생전에 그가 ‘한국의 세지마 류조’라고 격찬한 정열적인 상사맨도 있었다. 석유 세일즈로 일본 상사맨의 전설이 된 세 지마 류조에 버금가는 인물로, 김창호 전 SK유통 사장이 꼽힌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특명을 받아 총탄이 난무하는 중동을 오가며 목숨 건 석유 외교전을 펼쳤다. 그런 그들이 일궈낸 쾌거를 한낱 ‘새우’라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년 전 하루하루 가난을 견뎌내기도 힘겹던 시절,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왕 을 꿈꾸던 고래가 있었다. 1962년 11월, 33세의 혈기왕성한 야심가가 선경에 들어왔다. 미국 유학 생활을 중도 청산하고 귀국한 최종현 선대회장은 선경의 두 번째 혁신을 준비했다. 이전 첫 번째 혁신은 선경의 창업이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전쟁 폐허에서 사망선고 받은 직기 20대를 되살리고 히트 상품을 연달아 출시하면서 국내 섬유업계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직물산업이 정체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제2의 혁신을 고민했고, 그때 선경에 합류한 아우 최 종현 선대회장이 석유화학과 정유사업을 제안했다. 두 번째 혁신에 의기투합한 형제의 꿈은 1970년대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이토추·데 이진과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당시 일본은 경제성장에 따른 경제규모의 팽창으로 정유시설이 턱 없이 부족했으나,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자국에서의 정유시설 증설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정유산 업 육성에 대한 목마름은 국내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경제개발의 방향도 경공업에서 중공업, 석023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유화학공업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를 기회로 판단한 최종현 선대회장이 외자유치를 통한 정유 사업 진출을 구상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이토추·데이진과는 이해타산이 잘 맞아떨어졌다. 선경은 1973년 초, 이토추·데이진이 공동 투자하는 일산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건설에 합의했다. 일 본측에서 약 10억 불의 자금과 기계 및 기술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선경은 공장부지와 운영 을 담당하기로 하고 1973년 7월 1일, 선경석유(주)를 설립했다. 선경석유 설립 이후 후속작업도 탄탄대로를 달렸다. 정부로부터 온산 일대 330만 ㎡ 규모의 석 유사업단지 조성 내인가를 획득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는 1일 15만 배럴의 원유 공급 확 약도 받아냈다. 그러나 선경의 야심찬 계획은 뜻하지 않은 4차 중동전쟁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합작 파트너였던 일본측 입장에서는 선경석유 운영이 그들의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데다가 원유가 격 부담으로 일본의 외화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사업을 지속하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선경 입 장에서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 무기화에 따른 석유파동으로 모든 가격구조가 바뀌는 바 람에 석유사업은 하루 아침에 수지 안 맞는 사업으로 전락했다. 이로 인해 외형적으로는 사업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과 막 개토식(開土式) 끝낸 울산의 공장부지 30여만 평이 남았지만, 선경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자세로 석유사업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더욱이나 산유 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교섭을 통해 이뤄진 1일 15만 배럴의 원유공급 계약은 살아있었으므로 석 유사업의 핵심은 계속 유지된 것이다. 이는 훗날 선경의 유공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선경은 섬유업계 1위였지만 폴리에스터를 시작할 때부터 중화학공업에 진출하고자 노력했다. 당 시 일본에서는 데이진과 이토추가 정유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정부 규제가 심해 한국 진출을 모 색하고 있었다. 특히 데이진의 오야 사장이 이란우호협회장을 맡고 있어 이란에 대한 발언력이 강 할 때였다. 그래서 이란에서 오일을 가져와서 한국에서 정유사업을 하자고 선경·이토추·데이진이 합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이스라엘·중동전쟁으로 중단하게 됐고, 최종현 선대회장과는 다 음 기회에 꼭 정유사업을 다시 하자고 약속했었다.” (감바야시, 1960~1970년대 이토추 한국담당자 인터뷰, 1999)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우리의 목표는 석유에서 섬유까지 완전 계열화에 있다. 우리의 섬유산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 해서는 석유화학공업 진출이 불가피하며, 더 나아가 석유정제사업까지 성취시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섬유산업에 필요한 원료의 안전 공급과 저렴한 코스트를 보장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최종현 선대회장, 신년사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천명, 1975.1.1) 정유사업 진출 실패라는 수업료를 톡톡히 치러내야 했지만, 고래의 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10년 앞을 내다보며 전열을 재정비했다. 영 성과가 없지도 않았다. 사우디와의 교섭으로 확보한 024 PROLOGUE 경제 대국의 길, 에너지 Pioneer 1962-1979 1일 15만 배럴의 원유 공급 약속이 아직 살아 있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훗날을 기약했다. 사우디와의 인연은 최종현 선대회장의 미국 유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이미 미국 유학 중인 사우디 왕족과 친분을 쌓았다. 따라서 데이진의 이란 인맥에 의존하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원 유 확보에 나설 수 있었다. 사우디에서 만난 사업 파트너는 실력자 베드라위였다. 최종현 선대회 장은 사우디의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공장 건설 지원을 조건으로 석유공급 확답을 받아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인연은 단발로 끝나지 않았다. 베드라위를 통해 사우디 왕족과 더욱 친분을 쌓게 됐고, 국영 석유회사는 물론 야마니 석유장관과도 친분을 맺었다. 그의 사우디에서의 영향력은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 빛을 발했다. 이 시기는 최종현 선대회장 에게 빛과 그림자였다. 정유사업 진출 실패의 뼈아픈 상처를 남겼지만, 한편으론 민간 석유외교능 력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기도 했다. 1973년 아랍권이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해 석유생산을 줄이자,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가 제1 차 석유파동에 휩싸였다. 원유 가격이 4배나 치솟았고, 더구나 OPEC이 한국에 원유 공급을 줄이 겠다고 통보했다. 김종필 총리를 포함한 사절단이 사우디로 급파됐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사우디와 무역 거래를 튼 후 사업상 웬만큼 손해를 봐도 눈 한 번 꿈쩍하지 않 았다. 사우디 왕실 측근인사를 (주)선경의 현지 대리인으로 활용하면서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저명인사를 초청, 당시 국내 최고급 호텔이었던 워커힐로 모셔다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이름은 사우디 왕가에까지 알려졌다. 1차 석유파동 때 그런 최 회장을 정부가 그냥 둘 리 없었다. 정부 차원에서 그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월간조선 인터뷰, 2002.2)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명감을 느낀 최종현 선대회장은 현지 주재원 김창호에게 사우디를 설 득하라는 긴급 특명을 하달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김창호는 사우디 고위 관계자로부터 이면조건 을 받아냈고, 이를 곧바로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전달했다. 그가 정부에 재차 전달한 이면조건의 내용은 한국의 친아랍국가 선언이었다. 정부가 서둘러 조 건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원유가 정상대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국가가 못한 일을 민간인이 해결 하면서 고래의 꿈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최종현 선대회장이 ‘석유에서 섬유까지’를 표방한 것은 1975년 신년사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973년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도 선경이 가야할 길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점을 분명히 천명 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1975년 신년 메시지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선경을 국제적 차원의 기업 으로 부각하기 위해 제시한 2가지 명제 중 하나로, ‘석유에서 섬유까지’를 천명한 것은 ‘기업 확장 과 경영능력 배양’이라는 선경이 지향해 나갈 제2창업 선언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1차 석유파동 때 사우디의 영향력을 확인한 최종현 선대회장은 이후 사우디 투자를 더욱 확대025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했다. 비록 사우디 내부 사정으로 무산되긴 했으나 1975년 사우디 국영 화학공사가 추진 중이던 연산 1만 톤 규모의 플라스틱공장 건설계획에 투자 합작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또 계속해서 사 우디 왕족을 국내로 초빙해 관계회사에 소개하는 등 다각적인 우호관계를 증진해 나갔다. 선경이 보여준 무한 신뢰에 사우디도 뜨겁게 반응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1977년 10월 야마니 석유장관의 초청을 받는다. 사우디 석유장관의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 시 야마니는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2가지를 약속한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원유를 더 증량 공급해 주겠다." "원유 도입을 교섭할 민간회사를 설립하고 민간 베이스의 원유 도입을 교섭해 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 이는 원유 공급의 백지수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백지수표를 사용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1978년 10월 이 란에서 발생한 정치적 소요사태는 폭동으로 발전했고, 이듬해 1월 16일 결국 팔레비 왕정이 무너 졌다. 이란의 석유수출 중단과 함께 국제 석유가격이 급등하면서 세계 경제는 다시 마비됐다. 2차 오일쇼크의 시작이었다. 이때 이미 최종현 선대회장은 GULF의 철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GULF는 내부 반발은 물론, 한국 정부와도 갈등을 빚고 있었다. 석유화학사업을 통해 새로운 부가 가치를 창출하자는 내부의 요구와 한국 정부의 권고에도 GULF는 기존 정유사업만 고집하면서 투 자를 회피했다. GULF로서는 원유 도입과 운송권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싫었고, 오일 쇼크로 유공이 이익창출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GULF는 적정 규모의 이익창출 후 기 존 50%에서 25%의 지분을 한국 정부에 이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GULF는 전량을 이양하고 매각차익을 얻는 게 이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GULF의 철수가 곧 민영화로 이어지리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선 경은 철저한 정세분석을 통해 유공의 민영화를 확신했다. 무엇보다 석유 유통시장이 변하고 있었 다. 종래 석유 유통시장을 지배하던 GULF와 같은 석유 메이저의 시대가 가고 산유국이 직접 거래 에 개입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더구나 중동의 상관습은 정부 대 정부의 거래방식을 꺼리고 민간기업과의 교류를 선호하고 있었다. 2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GULF의 철수를 예감한 최종현 선대회장은 자신을 팀장으로 하고 손길 승·김항덕 이사를 팀원으로 하는 ‘유공인수TF팀’을 비밀리에 구성했다. 단 3명 외에 그 누구도 모 르게 고래의 유공사냥이 본격화한 것이었다. 2차 석유파동의 회오리 속에 국내 정치는 혼돈을 거듭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이 시해된 데 이어 12월 12일, 신군부가 주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야말로 국가 비상사태였 다. 혼돈의 격동기를 맞아 선경그룹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정치적 혼란도 혼란이지만, 오일쇼크 로 경제가 마비될 상황이었다. 원유 재고가 10일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현물시장 가격은 천정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