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236 CHAPTER 3. NEW VALUE 글로벌 일류 에너지·화학기업을 향한 도전 2009-2016 17 새로운 자원 영토에 SK 깃발을 SK이노베이션 석유개발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나라는 베트남이다. 1999년 쿨롱 분지 탐사권 을 획득한 이후 몇 차례 실패 끝에 2015년 이후 락따방과 그 근방에서 잇달아 유정을 발견했다. 북예 맨 마리브에 이어 우리 손으로 해외 원유를 생산한 역사적 장소는 남미 페루다. 페루가 더욱 특별한 건 광구 개발에만 그쳤던 석유개발사업을 수직계열화한 첫 사례라는 점이다. 유전개발뿐만 아니라 가스생산-수송-제품생산-수출을 망라하는 일관체제를 확립했다. 237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내디뎠던 SK의 첫발. 최종현 선대회장은 1982년 자원기획실을 설립하며 에너지 독립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사실 기술력과 전문인력이 전무했던 SK의 도전은 무모해 보였다. 글로벌 메이저 기업들이 장악 한 석유개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첫발은 확고한 의지 위에 자원부국의 뚝심 으로 자라나 SK이노베이션을 대한민국 대표 자원개발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정유기업마다 부진한 실적을 피할 수 없었던 2010년대 중반. 정유산업 전 체가 극심한 침체에 빠진 그때, SK이노베이션이 연간 영업이익 ‘1조 클럽’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 는 우려가 들려왔다. 그때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2011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매출 1조 원, 영업 이익 5,000억 원을 돌파한 자원개발사업이었다. 석유개발사업은 성공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투자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성공할 경우 보상이 매우 큰 대표적인 고부가가치사업이기도 하다. 일반 제조기업의 평균 이익률이 5% 안팎인데 반 해 40~50%에 육박하는 석유개발사업의 이익률은 놀랍다. 양대 축인 정유와 석유화학사업이 동 반부진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자원개발사업의 존재감은 더욱 빛날 수밖에 없었다. 원유의 안정적 확보는 지금이나 미래나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 매우 중요한 과제다. SK이노베이 션은 2011년 6만 배럴 돌파에 이어 2013년 일일 원유 생산량 7만 배럴 시대를 열었다. 지분 원유 보유량도 늘어났다.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9개월여를 쓸 수 있는 약 6억 3,300만 배럴에 이르렀 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자조와 회의는 에너지 독립을 향한 SK이노베이션의 확고한 의지와 끊임없는 도전과 함께 서서히 옛말이 되어갔다. 054. 베트남에서 찾은 ‘검은 진주’ 석유 SK이노베이션의 해외 자원개발 역사에서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관통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베트남이다. 그 시작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SK이노베이션은 1999년 베트남 쿨롱(Cuu Long) 분지의 15-1 광구 탐사권을 획득해 2003년 석유 상업생산을 시작했다. 이후 2007년 베트남 정부와 15-1/05 광구에 대한 광권 계약을 체결했 다. 베트남 남동부 해상에 위치한 15-1/05 광구는 SK이노베이션 25%, 미국 머피(Murphy) 40%, 베트남 국영 석유회사인 PVEP(PetroVietnam Exploration Production Corporation)가 35%의 지 분을 각각 보유했다. 수많은 탐사와 실패, 개발이 이어졌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SK이노베이션은 베 트남 15-1 광구에서 탐사-개발-생산까지 석유개발사업의 전 과정에서 성공한 경험을 밑거름 삼아 ‘검은 진주’를 캐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마침내 2015년 15-1/05 광구의 락따방 구조에서 원유를 발견했다. 238 CHAPTER 3. NEW VALUE 글로벌 일류 에너지·화학기업을 향한 도전 2009-2016 수많은 실패 끝에 드디어 자원개발사업에 순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하루 최대 2,450배럴의 시험생산 결과를 취득, 상업성 있는 원유 부존량을 확인했다. 그리고 2019년 1월 상업성을 선언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에서 겹경사가 났다. 락따방 구조 인근 락따짱 구조에서 원유가 추가로 발견됐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2019년 3월 초부터 4,295m가량 시추작업을 진행해 약 두 달 만 에 1·2차 목표 구간에서 총깊이 116m에 이르는 오일층을 발견했다. 락따방 구조에서 축적한 경험 및 기술력에 힘입은 결과이자 2019년에만 두 번째 성과였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어떻게 SK이노베이션 자원개발사업의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었을까. SK이노 베이션이 참여한 광구는 전부 쿨롱 분지에 위치해 있다. 베트남 해상에서 가장 가까운 산유지가 바로 쿨롱 분지다. 이곳은 석유가 풍부하게 묻혀 있다. 베트남이 생산하는 석유는 대부분 여기서 나온다. 중동처럼 큰 시장은 아니지만 채산성이 충분한 지역이고 계속 개발되고 있으니, 이곳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면 이익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SK이노베이션의 판단이었다. 베트남 정부가 해외 투자자에게 호의적이라는 점도 베트남 석유시장의 큰 매력이었다. 자 원 보유 국가와 외국계 회사가 투자해 광구를 개발하는 방식의 계약을 PSC(Production Sharing Contract)라고 한다. 이 계약에서 자원 보유 국가와 외국계 회사가 가져가는 몫을 각각 나눠 그 비 율을 따져보면 해외 투자사에 얼마나 유리한 지역인지를 알 수 있다. 베트남은 정부가 투자자의 경제성을 확보해주려 노력하는 편이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의 다른 자원보유 국가보 다 계약조건 자체가 유리하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약 20년간 한결같은 모습에 사업 파트너로서 SK이노베이션에 대한 베트남의 신뢰는 갈수록 깊어졌다. 2003년부터 원유 생산을 시작한 15-1 광구의 경우 약 20년이 지난 현재에도 활발하게 생산을 지속하고 있다. 2015년 원유를 발견해 2019년 상업성을 선언한 15-1/05 광구의 락따방 구조에서 는 2025년 생산을 목표로 개발 진행 중이다. 시기내용 1999 15-1 광구 탐사권 획득 2003 15-1 광구 원유 생산 2007 15-1/05 광구 광권 계약 체결 2015 15-1/05 광구의 락따방 구조에서 원유 발견 2019 15-1/05 광구의 락따방 구조 상업성 선언 2019 15-1/05 광구의 락따짱 구조에서 원유 발견 2020 16-2 광구 운영권 인수 베트남 자원개발사업 추진 현황239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페루 LNG 플랜트 준공식에서 연설 중인 최태원 회장(2010.6)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호치민 베트남 다낭 하노이 베트남 15-1과 15-1/05 광구 위치 15-1/05 광구15-1 광구240 CHAPTER 3. NEW VALUE 글로벌 일류 에너지·화학기업을 향한 도전 2009-2016 베트남과의 좋은 인연은 2020년 7월 베트남 16-2 해상광구 운영권 인수로 이어졌다. 2019년 10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PVEP와 16-2 광구 개발 참여 및 운영을 위한 지분참여계약(FOA)을 체결 했다. 이후 베트남 정부의 승인 과정을 거쳐 2020년 7월 16-2 광구의 공식적인 운영권자가 됐다. 16-2 광구는 베트남 붕따우에서 남동부로 1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베트남 최대 유전 인 백호유전이 근처에 있다. 예상 매장량은 3억 4,000만 배럴로 추산됐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이 2003년부터 원유 생산을 하고 있는 15-1 광구와 동일한 구조의 기반암으로 이뤄져 있다. 채산성 이 높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16-2 광구 운영권 인수는 쿨롱 분지를 하나로 묶는 SK이노베이션의 큰 그림이다. SK 이노베이션이 진출한 광구가 많은 쿨롱 분지를 하나의 클러스터로 만들기 위한 것. 즉, 이미 광권 계약을 체결한 15-1, 15-1/05 광구와 함께 16-2광구까지 3개 지역을 중심으로 광구 개발 및 탐사 에 집중 투자한 뒤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복안이다. SK의 ‘무자원 산유국’의 꿈 40년, SK이노베이션이 베트남에서 생산-개발-탐사 등 각 사업단계 별 전략 기반을 마련하며 자원개발사업의 또 다른 성공모델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055. 페루 LNG 생산 개막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가 북예멘 마리브 광구에 이어 두 번째로 원유를 제 손으로 생산 한 역사적인 곳이 남미의 페루다. SK이노베이션은 1996년 외환위기가 엄습해 오는 가운데서도 도 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페루 8 광구에서 원유를 상업생산하기 시작했다. 자원의 변방이었던 대한민국의 에너지기업 SK이노베이션은 숱한 좌절 속에서 새로운 꿈의 터 전을 찾아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페루 88, 56 광구에 대한 광권 계약을 각각 2000년과 2004년 체결하고, 2004년, 2008년부터는 천연가스 및 석유 제품을 생산했다. 88, 56 광구는 석 유환산량으로 하루 평균 17만 배럴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SK이노베이션이 보유 중인 광구 가운데 가장 많은 생산량이었다. 하지만 페루가 더 특별한 이유는 광구 개발에만 그쳤던 석유개발사업을 현지 유전개발-가스생산-수송-제품생산-수출을 망라하는 수직계열화 완성으로 진화시켰기 때문 이다. SK이노베이션은 2010년 페루 LNG 플랜트를 완공하고 본격적인 상업생산에 돌입했다. 2006 년 페루 수도 리마의 남부 해안에 천연가스를 액화해 해외로 수출하기 위한 생산기지 건설사업 (페루 LNG프로젝트)에 나선 지 4년 만이었다. 광구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가스관을 통해 끌어 온 후 LNG로 가공해 북미 등에 수출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마침내 2010년 리마 남쪽 170km 지점에 있는 팜파 멜초리타(Pampa Melchorita) 지역의 521 만 ㎡ 부지에 대규모 LNG 플랜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형 액화 공장과 13만 5,000톤 규모의 241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대형탱크 2기, 해상터미널 등이 들어서 연간 440만 톤의 LNG 생산이 가능했다. 이는 국내에서 2 개월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생산광구에서 LNG 플랜트까지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파이프라인도 건설했다. 총 408km로 경 부고속도로의 길이와 맞먹었다. 6,000m 이상의 고봉이 즐비한 안데스 산맥도 넘어야 했다. 해발 4,900m를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페루 LNG 생산시대를 개막하면서 SK이노베이션은 페루 내 천연가스의 생산-수송-액화-수출 판매를 아우르는 가스 밸류체인을 완성했다. 나아가 페루를 에너지 수출국으로 전환시키며 한-페 루의 동반성장시대를 열었다. SK이노베이션은 2011년 7월 브라질 광구 매각으로 남미에서 다시 한번 해외자원개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브라질 광구 매각은 매각 대금만 무려 24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투자금 7억 5,000만 달러의 3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국내 민간기업이 거둔 자원개발 계약 가운데 가장 성공 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국내 민간기업이 보유한 생산·탐사광구를 글로벌 메이저 석유개발기업 에 성공적으로 매각한 첫 사례이기도 했다. 당시 SK이노베이션이 브라질 광구를 매각한 이유는 지분투자 중심의 자원개발 방식에서 벗어 나 석유광구를 독자 개발·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브라질 광구 매각대 금 24억 달러를 재투자해 자원개발사업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해외 자원개발사업의 일부 축소를 감내하면서까지 브라질 광구를 팔 당시에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탐사광구를 줄이고 생산광구를 늘려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는 미래지향적 전 략은 두 수를 내다본 적시타였다. SK이노베이션의 자원개발사업은 지속 성장의 날개를 다시 크게 폈다. SPECIAL 242 하이닉스 인수, 초우량 반도체기업으로 육성243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2022년 SK가 주목받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글로벌 기업 집단 중 탄소감축에 필요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는 가장 큰 기업이라는 점과 소위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인 배 터리·바이오·반도체(Battery·Bio·Chip)를 모두 갖고 있는 유일한 회사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SK이노베이션의 역사는 아니지만, 반도체 이야기를 사사에 싣기로 했다. SK가 반도체와 인연을 처음 맺은 것은 2012년 하이닉스 인수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78년으로 거슬러 올 라간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석유에서 섬유까지’를 천명하 고 석유사업을 일관성 있게 준비하면서 석유에 이어 “앞으 로는 반도체와 이동통신사업을 해야 한다”라면서 경북 구 미 전자단지 인근에서 ‘선경반도체’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2차 석유파동의 여파 로 3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 인 2012년 최태원 회장이 하이닉스를 품에 안았다. 30여 년 만에 선대회장의 꿈을 이루며 SK이노베이션(당시 유공), SK텔레콤(당시 한국이동통신)에 이어 세 번째 퀀텀점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하이닉스가 SK그룹의 식구가 되는 것은 하이닉스뿐만 아 니라 SK에도 큰 기회이자 도전이다. 회장으로서 하이닉스 를 반드시 성공시켜 향후 그룹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발전 시켜 나가는 데 매진하겠다. 또한 하이닉스의 질적 성장을 통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그룹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 할 수 있도록 직접 챙기겠다.” (최태원 회장, 하이닉스 이천공장 방문, 2011.12.22)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 이천공장과 청주공장을 잇달아 방문해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뛰겠다’라며 한마 음 한뜻으로 함께 성장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이때까지도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3조 원 규모의 무리한 인수합병 (M&A)이 결국 ‘승자의 저주’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2021년 말 기준 SK하이닉스는 국내 시가총액 2위이자 인텔, 삼성전자를 잇는 글로벌 반도체 매 출 3위 기업으로 도약했다. 10년 전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 명하고 있다. “믿어달라. 하이닉스 성공시킬 자신 있다” 2010년 1월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은 귀가 번쩍 뜨였다. 4차 산업이 주력인 시대가 되면 서 핵심 인프라가 될 반도체사업의 전망이 밝다는 글로벌 리더들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성장동력 찾기로 복 잡하게 얽혀 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SPECIAL 244 최태원 회장은 곧바로 반도체 공부를 시작했다. 각계각 층의 반도체 전문가를 모아 열심히 공부했다. 2009년 채권 단의 하이닉스 매각이 불발된 가운데 하이닉스 인수를 염 두에 둔 포석이었다. 1년 가까이 반도체를 파고든 최태원 회장은 반도체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사업이라고 확 신했다. 2010년 말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는 의중을 밝혔다. 그 룹 대부분의 경영진이 반대 입장이었다. 예상한 반응이기 도 했다. 높은 인수금액과 반도체산업의 막대한 투자규모 를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수조 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로 모기업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잘 알지 못하는 반도체사업을 과연 잘할 수 있느냐는 의 구심도 주요 반대 요인이었다. 에너지, 통신 등 그룹 내 캐 시카우(Cash Cow)가 안정적인 상황에서 굳이 왜 해보지도 않은 사업에 뛰어들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들이었다. 설사 반도체에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하이닉스의 가 치가 올라갈 것이냐는 의구심도 컸다. 반도체는 사이클이 뚜렷한 산업이다. 사이클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 자가 뒷받침돼야 한다. 10년 가까이 부실기업이었던 하이 닉스로서는 적기에 투자하지 못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SK 에 커다란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그럼에도 최태원 회장은 성공에 대한 확신과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반대를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밀 어붙이지 않았다. 토론과 소통을 통해 반도체사업 필요성 을 공유하고, 하이닉스의 잠재력에 대해 함께 분석했다. 애 널리스트를 초청해 반도체 관련 사내 세미나를 열기도 했 다. 투자 시 대규모 리스크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최악 의 반도체 경기가 지속될 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상실 험도 진행했다. 생각이 달랐던 경영진도, 내부 여론도 서서히 바뀌기 시 작했다. 실제 들여다보니 괜찮은 구석이 꽤 많았다. 하이닉 스는 회사 매각설이 불거지는 상황에서도 세계 최초로 44 나노 DDR램 개발에 성공하는 등 어떤 난관에서도 포기하 지 않는 도전정신과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 주주가 없는 상태로 10년 가까이 지내오면서도 꾸준히 경 쟁력을 유지해 온 점도 긍정적이었다. SK의 시너지까지 더 해진다면 더 높이 날아오를 여지가 충분했다. SK는 하이닉스를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TF팀을 정식으 로 꾸렸다. 자금 조달은 채권단 지분을 일부 인수하고 신 주를 발행해 투자 재원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했다. 총 3 조 4,267억 원이 투자됐는데, 1주당 인수 가격은 구주 2 만 4,500원(총 1조 841억 원), 신주 2만 3,000원(총 2조 245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3,426억 원)이었다. 사실 당초 채권단은 썩 반기지 않았다. 최태원 회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반도체 경기가 좋아지면 주가가 올라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2011년 11월 최 종적으로 지분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2012년 2월 14일 하 이닉스의 주식 인수대금 납입을 완료했다. 마침내 SK그룹 은 하이닉스를 품에 안았다. SK하이닉스, 10년 전 모험을 확신으로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를 최종 인수한 뒤 이천공장에 상 주하다시피 했다. 직접 방진복을 입고 공장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구석구석 둘러보며 투자 확대를 약속했다. 인수합병 초기에 인수 측 회사에서 ‘점령군’을 보내는 것 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SK는 하이닉스로 5인 미만의 임원 만 투입했다. 오히려 하이닉스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기업 문화를 SK그룹 전체에 확산시키는 데 집중했다. 최태원 회 장은 기존 하이닉스의 기업문화에 대해 “치열한 생존 DNA 를 가졌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012년 3월, SK하이닉스는 SK그룹의 일원으로 공식 출 범했다.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최태원 회장 등 2,000여 명 의 구성원이 참석한 가운데 출범식을 열고 ‘세계 최고 통합 반도체 회사’로 도약하기 위한 새 출발을 선언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종합반도체회사를 향한 혁신의 시작이었다. 의욕에 찬 출발과 달리 업계 상황은 좋지 않았다. 2012 년 SK그룹 편입 당시 반도체산업은 투자 규모의 역성장 시 기였다. 업황이 불투명해 평균 투자규모가 축소된 상황이 었다. SK하이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잇달아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최태원 회장의 결단과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공격적인 투자는 성공적인 경영실적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주기적으로 영업손실을 기록했지만 편입 이후인 2012년 4분기부터 흑자로 전환했다. 시장도 SK의 편으로 돌아섰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 고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 증해 탄탄대로를 열었다. 2021년 매출액 24조 9,992억 원, 영업이익 12조 3,280억 원에 시가총액 92조 원으로 국내 시가총액 2위, 반도체산업에서는 매출 기준 삼성전자와 인 텔 다음으로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SK하이닉스는 미국과 중국을 양대 해외거점으로 삼아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 다. 2021년 말 인텔(intel)의 낸드사업부를 인수하고, 2022 년에는 ‘글로벌 공급망 해결에 기여한다’는 차원에서 150억 달러 상당의 투자를 천명했다. 중국사업도 확대하고 있다. 기존 우시 D램공장과 인텔의 다롄 낸드플래시공장에 이어 우시 반도체 파운드리라인 구 축까지 끝내면 SK하이닉스는 D램·낸드·파운드리 3개 부문 에서 모두 현지 대응이 가능해진다. SK그룹이 하이닉스 인수를 위해 투입한 금액은 3조 5,000억 원 가량. 10년 만에 시가총액 90조 원 규모의 세 계 Top 3 반도체기업으로 성장했으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 를 알아본 그 통찰력과 황금알을 낳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 으로 지원한 열정과 의지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