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106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터 가동에 들어갔다. 고도의 처리과정을 거쳐 정부 규제치보다 10배 이상 깨끗한 물로 변환할 수 있는 획기적인 환경설비였다. “울산CLX는 5월 11일 국내 정유사로는 최초로 종합폐수처리시설을 완공, 6월 1일 시험 가동에 들 어갔다. 이번에 완성된 시설은 울산CLX 내의 모든 폐수를 수집, 물리·화학·생물학적인 고도의 처 리과정을 거쳐 정부 규제치보다 10배 이상 깨끗한 물로 변화시킬 수 있어, 이 처리시설을 거친 물은 농·공업 용수는 물론 생활용수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일일 처리량이 2만 6,000톤 규모인 이 시설은 유공이 263억 원을 들여 선경건설과 함께 2년 반 만에 완성한 것으로, 처리 폐수 중 1만 4,000톤은 울산CLX의 공업용수로 재활용하고, 나머지는 엄격한 자동 측정장치의 검사를 거쳐 방류, 농업용수 및 생활용수로 사용된다. 이 처리시설의 완공으로 울산CLX는 용수부족 해소와 처리과정에서 회수된 유분을 석유정제 공장에 재투입함으로써 경비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사보 <선경>, 1992.6) 종합폐수시설과 종합소각로에 이어 유공은 1992년 7월부터 800억 원이 투입된 일산 3만 5,000배럴의 신규 ‘등·경유 탈황시설’을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등·경유 탈황시설은 값싼 고유황 원유를 정제, 최고 96% 이상 유황 성분이 제거된 초저유황 등·경유를 생산하는 설비이다. 이로써 유공은 연간 4,000만 달러의 국제수지 개선, 원유 도입처 다변화, 대기오염 방지 등의 효과를 거 시기내용 1982.12.9 최종현 회장 환경경영 강조 1985 유공 연구소 설립 1990 환경 마스터플랜 수립, 1단계 5,300억 원 환경시설 투자(1990~1995) 1991‘법을 어기지 않는 기업’ 차원 넘어 ‘환경보전기업’으로 성장 1991.7 종합소각로 본격 가동 1992.5 종합폐수시설 완공 1992.7 ‘등·경유 탈황시설’ 본격 가동 1993.4 경유 차량 매연제거 기술 독자 개발 1993.11.26신규 환경설비 합동 준공식 1996 2단계 4,250억 원 추가 투입(1996~2000) 1996.2 제2종합폐수처리시설과 오폐수처리장 완공 1996.9 환경설비 갖춘 제5정제시설 완공, 세계 최대 친환경 정유공장으로 부상 유공의 환경경영 연혁107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뒀고, 1963년 국내 최초로 등·경유 탈황시설을 가동한 이래 하루 총 4만 9,000배럴의 초저유황 등·경유를 생산할 수 있었다. 환경기술 개발에도 매진, 1993년 4월 팔라듐 촉매를 이용해 경유 차 량에서 발생하는 공해물질인 매연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매연제거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 기도 했다. 1993년 11월 26일, 유공은 제1중질유 탈황·분해시설, 제3등·경유 수첨 탈황시설, 종합폐수처리 장, 종합소각로 등의 신규 환경설비 합동 준공식을 거행했다. 준공식이 열린 울산CLX에는 당시 김항덕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 및 국내외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총 투자비 6,000억 원이 들어간 신규 환경설비의 완공으로 유공은 1단계 환경 마스터플랜 목표를 조기에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1단계 조기 달성에 이어 2단계 환경 마스터플랜 실행에 돌입한 유공은 1996년 5월 2일, 울산 CLX 내에 제2종합폐수처리시설과 오폐수처리장을 완공, 시험 가동에 들어갔다. 총 200억 원을 투자, 약 16개월에 걸쳐 완공한 제2종합폐수처리시설은 제4정유공장과 제2중질유 분해·탈황시설 등 신규 시설에서 배출되는 공정 폐수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최신의 환경설비였다. 1996년 9월 유공은 울산CLX 내의 3만 3,000㎡ 부지에 제5정제시설을 완공하고 10월 본격적 인 가동에 들어갔다. 1994년 4월부터 총 4,510억 원이 투입된 이 시설은 하루 20만 배럴의 상업 정제, 6만 배럴 규모의 등·경유 수첨탈황, 100톤 규모의 유황 회수시설 등으로 이뤄진 신규 플랜 트였다. 특히 등·경유 수첨 탈황시설의 가동으로 초저유황 경유인 0.05경유를 생산, 환경오염 저 감에 획기적으로 기여했고, 1,600억 원 이상의 국제수지 개선 효과도 거뒀다. 이후로도 울산CLX 는 기후변화 대응, 온실가스 감축 등 환경 이슈에 선도적으로 대응하면서 세계 최대 친환경 정유 공장의 명성을 계속 이어 나갔다. 018. 선경 인재양성의 요람 장학퀴즈, 한국고등교육재단 최종현 선대회장은 기업경영에서 인간 본연의 능력을 중시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수 준인 SUPEX를 추구할 때 회사가 세계적 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SUPEX추구가 기업혁신의 지상과제라고 설정할 때, 그가 추구했던 사회공헌은 ‘인간 본연의 능 력’을 최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인재양성’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꿈꾸는 사회혁신이었다. 나무 를 키우듯 인재를 육성하면 언젠가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장학퀴즈 후원과 한국고등교육재단 설립에는 최종현 선대회장의 이 같은 사업보국 철학이 담겨 있었다. 장학퀴즈가 한국 방송사상 최장수 기록을 세우며 기네스북에 오르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MBC 마찬가지였다. 1973년 2월 18일 일요일 오후 4시, 마침내 장학퀴즈가 브라운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장학퀴즈는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에 힘입어 금108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세 저녁 7시 골든타임까지 꿰찼다. 장학퀴즈 후원은 유공을 품은 선경 사회공헌의 출발점이었다. 선경은 프로그램 제작비용 일체 를 부담하는 ‘풀 스폰서’ 형태로 장학퀴즈를 후원했다. MBC는 장학퀴즈가 1회성 이벤트에 머물 것 이라 예상했으며, 대부분 기업들도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고 후원을 기피했다. “열 사람 중 한 사람만 봐도 청소년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조건 없이 지원해도 괜찮다.” 모두가 외면하던 장학퀴즈 후원은 이처럼 최종현 선대회장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 다. 장학퀴즈 탄생 1년 뒤인 1974년 7월의 어느 날, 그는 프로그램의 순수성을 위해 제품 광고 대 신 공익 광고를 제작하라고 지시한다. 당시 선경은 가수 조영남이 선경직물 로고송을 부르는 스마 트 학생복 광고로 큰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른 하늘에 청천벽력 같은 지시가 떨어 지자 회사 구성원들의 불만도 많았다. “우리가 문교부라도 되는줄 아십니까.” “제품을 팔기 위해 후원한다는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독려하고,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기 위해 후원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80년대 장학퀴즈의 효과는 대단했다. 수백 명씩 몰려드는 학생들 때문에 매주 토요일 오후 정동 MBC 공개홀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학생들이 오전부터 진을 치는 바람에 다른 프로그램 들이 오전 녹화에 곤혹을 치렀고, 질서유지를 위해 경찰까지 동원됐다. 방송국 경비는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방청객들을 줄 세우느라 법석을 떨었다. 자동차도 다니기 힘든 비좁은 정동거리에 끝 이 안 보이도록 줄 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은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다. 학교 간 자존심 대결도 치열했다. 단체 응원단을 이끌고 스튜디오를 점령해버리는 학교장들도 많았고, 학교 밴드부가 장원에 오른 학생을 위해 시가행진을 벌이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3년 장학퀴즈는 20주년 기념과 함께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시기내용 1973.2.18 장학퀴즈 첫 방송(장학퀴즈 후원의 시작) 1974 스마트 학생복 상업광고 대신 장학퀴즈 공익광고로 전환 1974.11.26한국고등교육재단 설립 1980 년대장학퀴즈 최고의 인기로 녹화장 인산인해, 학교 간 자존심 대결 치열(단체 응원단으로 스튜디오장 점령사 태, 장원학생 시가행진 해프닝 등) 1993 장학퀴즈 20주년 맞아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한국 기네스 등재 1996 MBC 장학퀴즈 시대 마감 1997EBS 장학퀴즈로 새출발 2022 한국고등교육재단, 48년 간 장학생 4,000여 명, 박사 800여 명 배출 장학퀴즈와 한국고등교육재단 주요 연혁109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MBC 장학퀴즈 첫 방송(1973.2.18)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증서를 수여하고 있는 최종현 선대회장(1988)110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방송 20년이 지나면서 그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MBC는 상업방송 시대에 발맞춰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1996년 장학퀴즈가 MBC 시대를 마 감했다. 이후 선경의 ‘인재양성’에 대한 변함없는 철학은 EBS와 만나 1997년부터 EBS 장학퀴즈 시대가 열렸다. 한국고등교육재단 역시 최종현 선대회장이 설계한 인재육성의 사회혁신 프로그램이었다. 그 는 우리나라 대표적 기업가이자 사회사상가로서 민족애가 남달랐다. 세계적 석학 양성이라는 분 명한 목표를 가지고 학술지원활동에 나섰다. 민간기업 최초로 ‘일등 국가, 일류 국민 도약과 고도 의 지식산업사회 건설’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1974년 11월 26일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 했다. 그러나 장학재단 설립에 대한 회사 내부 분위기는 부정적이었다. 회사 규모가 이제 겨우 50대 기업에 꼽힐 정도였고, 선경유화를 설립하는 등 잇따른 투자로 자금 상황도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최종현 선대회장의 의지는 단호했다. “우리나라가 지금은 변방의 후진국이지만 30년 후에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다. 자원 빈 국에 자본주의 경험도 일천한 이 나라는 그때쯤이면 지적 역량이 모자라 발전이 더딜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세계적인 학자를 키워야 한다.” 재단을 둘러싼 회사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사재를 털어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인재육성의 목표를 100년으로 잡았다. 인재를 키우는 데는 최소한 1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국내에서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을 세계 유수의 대 학으로 보내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연구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 아와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논리였다. “지금은 국민도, 기업도, 국가도 배가 고프지만 우리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모두가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한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선택과 집중으로 엘리트 인재를 육성해왔다. 미국의 하버드, 스탠퍼드, 예 일, 프린스턴, 버클리, 시카고 대학과 같이 초일류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았다. 재단의 채찍에 학생 들은 최선을 다해 꿈을 이뤄냈고, 이러한 성과에 미국의 유명대학들이 한국 학생들을 인정하기 시 작했다. 특히 그들은 초일류 대학만을 지향하는 목표지향적인 재단의 장학사업에 주목하고 그 취지를 인정했다. 그 덕에 몇 명 되지 않는 대학원 프로그램의 경우 참여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님에도 재단이 재정지원을 한다고 하면 한국 학생을 받아들이는 사례가 늘어났다. 미국 대학들은 한국 학생들이 입학 이후에도 세계 인재들과 당당히 경쟁해 많은 성과를 달성하 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단 설립 이후 본격적으로 박사가 배출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 이미 미국 대학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재단의 선도적인 장학사업은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미국 유명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111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나는 내 일생 중 80%를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장학사업을 펼친 지도 벌써 48년이나 됐다. 인생의 8할을 인재양성에 투 신한 최종현 선대회장의 집념은 그동안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재단의 지원을 받아 공부한 장학생 이 4,000여 명을 넘어섰으며, 박사만 800여 명을 배출했다. 019. 현존 최장수 프로축구팀, 유공 코끼리축구단 스포츠 부흥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과 꿈과 희망의 가능성을 열었던 달콤한 혁신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창조는 온국민을 ‘오! 필승 코리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2021- 2022시즌 영국 프리미어리그 손흥민의 아시아 최초 득점왕 등극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을 또 한번 세계 만방에 드높였다. 그 달콤한 혁신의 이면에는 40년 변함없는 유공의 스포츠 후원 활동이 있었다. 1980년대 초 프 로축구 불모지 대한민국에 유공 코끼리축구단을 창단하고 K리그 태동의 씨앗을 뿌렸다. 국내 두 번째 프로축구단으로 출범했지만, 할렐루야축구단이 사라지면서 현존하는 국내 최장수 프로축구 팀으로서 대한민국 스포츠 부흥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82년 유공 혁신 비전을 직접 설계했던 최종현 선대회장은 또 다른 중대 결심을 한다. 그해 12 월 17일 한국축구의 부흥을 위해 유공 코끼리축구단을 창단했다. 온국민이 프로축구의 개막을 염 원했지만, 할렐루야축구단 하나만으로 프로축구를 열 수는 없었다. 유공 인수 이후 사업보국을 구상하던 그는 과감하게 한국축구 부흥에 힘을 보탰고, 유공·할렐 루야 2개의 프로팀에 이어, 대우·포항제철(현 포스코)·국민은행 3개 실업팀이 참여하면서 1983년 5월 8일 대망의 K리그 원년이 본격적인 개막을 알렸다. K리그는 그렇게 2개의 프로팀으로 출범했 고, 40년이 흐른 지금 유공 코끼리축구단은 원년 멤버 중 유일하게 남은 프로팀으로서 세계로 뻗 어가는 한국축구의 산증인이었다. 최초 K리그의 명칭은 슈퍼리그였다. 개막 경기는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당 시에는 서울운동장이라고 불렀다. 3만 관중이 운집했으며, 당시 입장료는 500~1,500원 수준이었 다. 개막 첫날 슈퍼리그는 1,500만 원의 입장료 수익을 올렸다. 1983년 5월 8일 오후 3시 54분, 유공과 할렐루야의 슈퍼리그 개막 경기가 열렸다. 유공 코끼리 축구단은 최종현 선대회장이 초대 구단주를 맡았다. 당시 유공의 조규향 상무가 초대 단장에 올랐 고, 이종환 초대 감독과 김정남 코치가 개막 경기를 지휘했다. 다소 몰리는 듯한 유공은 전반 23분 우측 코너에서 신문선의 센터링을 스위퍼 이강조가 어시스트, 박윤기가 골문 정면에서 슈퍼리그 첫 골을 탄생시켰다.112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유공 코끼리축구단 창단식(1982.12.17) 제주도로 연고지 이전 후 명칭을 변경한 제주유나이티드FC(2006)113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당시 동대문운동장은 관중석은 물론이고 육상 트랙까지 3만 명의 인파로 가득했다. 이전까지 그 런 분위기에서 축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어찌나 긴장을 많이 했던지 경기 직전까지 화장실을 10 번 정도 들락날락했다. 전반 11분 할렐루야의 오석재가 때린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왔는데 그 게 들어갔으면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박윤기 전 제주 국제대 감독, <동아일보>, 2020.5.7) K리그 1호골 뿐만 아니라 원년 득점왕(9골)도 박윤기 선수의 차지였다. 1987년에 나온 K리그 1,000호 골도 그가 기록했다. 창단 이후 유공축구단은 1984년 슈퍼리그 전반기 우승을 시작으로 각종 대회에서 중상위권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미드필드를 강화하고 공격적인 축구의 팀 컬러를 보이면서 국내에 선진 축구를 도입하는 선구자 역할을 담당했다. 2006년 프로축구단은 또 한번 큰 변화를 맞았다. ‘제주유나이티드FC’로 명칭을 변경하고 새로 운 연고지역인 제주도에 둥지를 틀었다. 제주도는 인구가 적어 대규모 관중 유치나 광범위한 팬클 럽 형성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런 만큼 국내 어느 스포츠구단도 연고를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 럼에도 SK는 제주도를 연고지로 지정하는 남다른 결단을 했다. 지역 스포츠 활성화를 통해 지역 주민에게 봉사하고, 나아가 국내 프로축구 발전의 새 지평을 열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제주도민들은 지역 최초의 연고 축구단 출범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도민들의 기대에 부응하 기 위해 감독과 선수들은 한층 수준 높은 경기를 위해 더 빨리, 더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볐다. 경기 장 안에서, TV 앞에서 ‘제주’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과 함께 어느덧 SK와 제주도는 한 마음이 됐다. 그사이 제주도는 스포츠 전지훈련의 메카로 떠올랐다. 구단은 제주의 역동적이고 건강한 이미 지에 부합하는 스포츠 후원활동을 통해 축구 저변을 계속 확대해 나갔고, 이와 함께 사회공헌활동 을 통해 도민과 유소년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선물했다. 시기내용 1982.12.7 유공 코끼리축구단 창단(구단주 최종현 선대회장, 초대감독 이종환, 코치 김정남) 1983.5.8슈퍼리그(현 K리그) 원년 개막, 유공 박윤기 선수 1호골 주인공 1984 슈퍼리그 전반기 우승 1996 완전 지역연고제 실시, 부천 유공으로 변신 2000 K리그 준우승 2004 FA컵 준우승 2006연고지 제주도로 이전, 제주유나이티드FC로 명칭 변경 유공 코끼리축구단 변천SK 이름으로 선도 CHAPTER 2. UNIVERSAL 08. 선경에서 SK로 비상 09. 아시아·태평양 최고 석유화학기업 부상 10. 대한민국 에너지 파워 기틀을 닦다 11. 신약·EV 배터리 R&D 끝없는 도전 12. 거침없는 해외시장 개척 13. 에너지 영토 확장 14. 사회혁신 재충전, 행복경영 속으로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