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096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은 국가적으로도 낭비라고 생각했다. ‘국가적으로도, 그룹에게도 유익한 사업이 무엇일까’를 구상 하다 떠오른 것이 바로 정보통신사업이었다. 정보통신 중에서도 하드웨어 부문은 기존의 전자업 체가 유리할 것으로 내다보았고, 결국 막연하게나마 정보통신 서비스나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두 기 시작했다. “조만간 인터넷 시대가 올 테니 여러분도 거기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전산처리도 제대로 안 되던 시절에 인터넷 시대까지 내다볼 정도로 최종현 선대회장의 미래 안 목은 놀라웠다. 잡힐 듯 말 듯한 정보통신이란 신기루를 응시한 그는, 그룹과 유공 간부진은 물론 가까이 지내던 교수들과 심도 있는 토론을 벌이고 자문을 구했다. 특히 사업차 미국을 방문할 때 면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를 찾아서 자문을 구했다. 당시 일본을 롤모델로 삼았던 다른 그룹의 경영자와는 달리 최종현 선대회장은 미국을 롤모델 로 삼았다. 그 이유는 정보통신에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법적·제도적 여건이 구비돼 있지 않았지만, 정보통신 선진국인 미국에는 무한한 정보와 기술 잠재력이 활성화 돼 있었다. 이에 1984년 미래사업의 구상 무대를 미국으로 옮기고 미주경영기획실을 설립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AT&T 같은 회사들의 분할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동전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성장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꽤 유망해 보였고 리스크도 적어 보였다. 그래서 회장님께 이동통신사업을 제안하게 됐다.” 최태원 회장의 회고이다. 당시 그는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미주경영 기획실에서 미래사업도 구상하고 있었다. 최종현 선대회장도 미국 이동전화를 주목하고 있던 터 라 아들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서서히 미주경영기획실을 중심으로 서서히 그룹의 미래 사업인 이동통신사업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유공도 정보통신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1986년부터 대리점 전산화, 주유소 POS 개 발 및 대리점 온라인시스템 보급 등의 OIL-VAN 관련 업무를 단계적으로 추진했고, 1990년 3월 대리점 온라인시스템을 개발·보급함으로써 OIL-VAN 구축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보통신 분야 첫 사업은 주유소 POS(Point of Sales)시스템 개발사업이었다. 이는 주유소의 판매시점에서 재고, 판매물량, 가격, 대금결제, 신용 등 경영에 필요한 각종 경영정보를 효율적으 로 제공하는 시스템이었다. 유공은 영업경쟁력 확보 및 주유소 경영합리화를 목적으로 1988년 7 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주유소에 POS시스템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유공은 기존의 POS를 개선하 기 위해 1989년 10월부터 IBM과 공동으로 주유소 POS시스템 개발을 추진, 1990년 3월 완료했다. 새로 개발된 시스템에는 온라인 기능이 부가되고 주유소 환경에 적합한 관련 주변기기, 응용프로 그램 등이 포함됐다. OIL-VAN과 POS시스템으로 기초 체력을 다진 유공은 정보통신사업 진출의 교두보 확보, 선진 기술 습득, 기술개발 및 사업화 도모를 위해 1989년 10월 해당 기술의 본거지인 미국 동부 뉴저지 주에 현지법인 유크로닉스(YOKRONICS.Inc)를 설립했다.097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이즈음 미주경영기획실은 1988년 미국의 소규모 이동통신사 테네시RSA에 지분을 투자한다. 투자 수익보다는 이동통신 경영을 학습한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유공과 미주경영기획실이 한 창 미국에서 이동통신 분야 실무능력을 배양할 즈음,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1990년 7월 정부는 이동통신 분야의 경쟁체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통신사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의 서막이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 고, 최태원 회장은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동통신 진출 경쟁 점화 소식에 유공은 1990년 10월 정보통신 신규사업을 위한 별도 자회사 인 YC&C를 설립했다. YC&C는 유공의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위한 벤처비즈니스로서 초기에는 워 크스테이션사업 및 소프트웨어 개발·판매로 시작했으나 PC사업 및 MIS용역 등 관련 분야로 사업 을 확대해 나갔다. 이외에도 1990년 5월 시스템통합 분야의 세계 일류기업인 미국의 CSC(Computer Science Corporation)와 합작으로 선경정보시스템을 설립, CSC의 기술이전을 도모하는 한편 그룹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및 관련시장 개척 등 CSC의 기술인력을 활용한 사업기 회 포착에 적극 나섰다. 이어 1991년 4월 선경텔레콤을 설립하여 그룹의 정보통신사업 진출 기반 의 한 축을 마련했다. 선경텔레콤은 1992년 대한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에 나섰다. 선 경텔레콤으로 미주경영기획실의 모든 핵심 멤버가 합류하고 각 계열사에서도 인재들을 차출해 모두 200여 명으로 확대된다. 목표는 오직 하나,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이었다. 016. 제2이동통신 포기와 한국이동통신 인수 대한텔레콤은 출발부터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국내에서만 준비해왔던 다른 경쟁자와는 달리 IT 선진국 미국 본토에서 이동통신 학습을 충분히 마스터했다. 그러나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대통령 과의 사돈관계가 자칫하면 특혜 시비로 비화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최종현 선대회장이 대한텔레 콤에 주문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2등이 없는 1등을 하라, 퍼펙트하게 이겨라’였다. 특혜 시비를 차단하는 유일한 방법은 경쟁자를 확실히 이기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불필요한 경쟁을 없애고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로 우선 생각했다. 그리고 글로 벌리제이션 시대의 성장 가능성을 고려하다 결국 정보통신사업 추진을 결정하게 됐다. SKMS와 SUPEX를 추구하는 우리로서는 충분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영역이라고 확신한다.” 최종현 선대회장이 1992년 신년사에서 밝힌 제2이동통신사업 도전의 일성이다. 대한텔레콤은 사업권 획득을 위해 사업계획서를 치밀하게 작성해 나갔다. 그러나 사업계획서 작성은 피를 말리 는 작업이었다. 밤에 주로 일하는 바람에 야행성 체질로 변한 팀도 있었고, 며칠씩 밤을 꼬박 새우098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제2이동통신사업권 반납 기자회견(1992.8.27) 제2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천명한 최종현 선대회장(1992)099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는 일도 다반사였다. 당시 기획담당 부장이었던 최태원 회장도 팀원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점심은 거의 자장면으로 때웠고, 팀원들과 함께 인근 사우나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대한텔레콤은 사업계획서 작성부터 경쟁자들과 격이 달랐다. 대부분 해외 파트너가 주로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지만, 대한텔레콤은 미국 현지에서 닦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작성했다. 1992년 6월 26일 총 20만 페이지에 달하는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정부의 심사는 1차 에서 일단 높은 점수를 받은 상위 3개 업체를 가려낸 다음 2차에서 최종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 됐다. 7월 29일 1차 심사에서 대한텔레콤은 경쟁자들을 큰 점수 차로 따돌리고 최종 라운드에 올 랐다. 코오롱과 포스코가 2,3위로 뒤를 이었다. 8월 20일 마침내 마지막 뚜껑이 열렸다. 최종현 선 대회장이 주문한 대로 대한텔레콤이 압도적인 차이로 최고 점수를 획득하고 제2이동통신의 주인 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승리의 환호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나친 경쟁이 이전투구로 변질되면서 근거 없는 유 언비어가 쏟아졌다. 노태우 대통령이 사돈관계인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사업권을 줘서 노후를 보 장받으려고 한다는 악성 루머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들의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불안한 대선정국은 선경그룹이 희생양이 되어주길 바랐다. 결국 최종현 선대회장이 결단을 내리 고 대한텔레콤 손길승 사장이 사업권 반납을 천명했다. “사업권 반납이 이동통신사업 자체를 포기하는 의미는 아니다. 오해를 받을 우려가 없는 다음 정권에서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다시 준비하겠다.” 최종현 선대회장도 재추진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사업권 반납은 도약을 위한 일보 후퇴에 불과하다.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추진한 이동통신사업은 결코 중단될 수 없다. 반드시 재도전하여 이 사업권을 다시 획득하겠다.” 이렇게 해서 사업자 선정이 백지화되고 그 공이 다음 정부로 넘어갔다. 국민적 관심이 높았던 만큼 다시 공을 넘겨받은 체신부로서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체신부 가 짜낸 묘수가 민간 자율 결정에 의해 단일 컨소시엄을 구성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덤으로 한국 이동통신도 주식 매각을 통해 민영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일로 엉뚱하게 공이 전경련으로 넘어갔다. 난처하게도 최종현 선대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전경련 회장사인 선경그룹이 사업권을 따내면 재계의 화목이 깨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종현 선대회장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 문제를 놓고 전경련 회장단은 삼성그룹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여섯 차례 회동을 가졌다. 결국 이번에도 최종현 선대회장은 사업권 포기를 결단했다. 재계는 그의 대승적 결정을 일제히 환영했다. 이로써 1994년 2월 28일 제2이동통신 사업권은 포 스코와 코오롱 연합의 신세기통신으로 넘어갔다. 그렇다고 선경그룹이 이동통신사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제2이동통신을 포기하는 대신 한 국이동통신을 인수하기로 방향을 선회했다. 제2이동통신 사업권 포기라는 대승적 결단을 내렸던 100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만큼 그들의 행보에 재계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업을 준비해온 그룹과 유공 구성원들의 아쉬움은 컸다. 1994년 1월 유공은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주식 23%를 주도적으로 인수하고 같은 해 7월 경영권을 획득함으로써 그룹의 숙원이었던 정보통신사업 진출의 문을 열었다. 당시 인수 한 한국이동통신 주식은 127만 5,000주로 주당 가격은 시중가를 훨씬 웃도는 33만 5,000원이 었다. 인수에 필요한 대금은 총 4,271억 2,000만 원으로, 유공은 이 중 대부분인 3,748억 6,000만 원 을 납입했고, 선경인더스트리가 308억 2,000만 원, 흥국상사가 214억 4,000만 원을 각각 납입 했다. 이후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인천, 부천지역에서 세계 최초로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 화 서비스를 개시했고, 1997년 3월 SK텔레콤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이동통신 서비스업체로 발전해 나갔다. 시기내용 1984 미주경영기획실 설립(미래사업 구상) 1989.2 유공, 정관 사업 분야에 정보통신사업 추가 1989.10 미국 동부 뉴저지주에 현지법인 유크로닉스(YOKRONICS.Inc) 설립 1990.3 IBM과 공동으로 주유소 POS시스템 개발 완료 1990.5미국 CSC 합작 선경정보시스템(주) 설립 1990.7 정부, ‘통신사업 구조조정계획’ 발표, 제2이동통신 사업자 경쟁 본격화 1990.10 유공, 정보통신 신규사업 별도 자회사 YC&C 설립 1991.4 선경텔레콤 설립 1992 선경텔레콤, 대한텔레콤으로 상호 변경,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 추진 1992.6.26 제2이동통신 사업계획서 제출 1992.7.29 1차 심사 통과(선경, 코오롱, 포스코) 1992.8.20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 1992.8.27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 1993 정부,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재추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발표 최종현 회장, 제2이동통신 사업권 포기 결단 1994.1 선경, 한국이동통신 주식 23% 주도적 인수 1994.2.28포스코, 코오롱 연합 신세기통신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 1997.3 한국이동통신, SK텔레콤으로 사명 변경 이동통신사업 진출 과정101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한국이동통신의 경영권을 획득한 선경그룹(1994.7) 한국이동통신의 경영권 획득을 통해 이동통신사업을 이어가고자 한 선경그룹(1994.1)102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07 100년을 내다본 ESG 비전 설계 ESG는 근래 국내외 업계의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SK 사사와 기업문화에 이미 수십년 전부터 녹아 있던 개념이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에 대한 염원을 불태우는 와중에도 탄소 기준치 규제 보다 강도 높은 환경종합관리체계의 확립에 힘썼다. 장학퀴즈 후원과 고등교육재단을 통한 인재양성, 유공 코끼리축구단 창단 등은 시대를 앞서간 사회공헌 사례들이다. 회사 구성원을 식구처럼 공동운 명체로 보는 노사문화, 사외이사 중심의 기업지배구조도 이해관계자 경영에 충실한 SK의 면모다. 103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ESG경영이 대두되기도 전인 1980년대 초, 최종현 선대회장은 100년 앞을 내다보고 유공 ESG의 토대를 닦았다. 울산CLX의 환경문제를 경계했으며, 그보다 앞서 장학퀴즈 후원과 한국고등교육 재단 설립으로 사회적 가치 실현의 기반을 다졌다. 유공 인수 직후 발언인 과감한 ‘권한이양’은 오 늘날 유공의 투명경영과 거버넌스 혁신의 작은 밀알이 됐다. Environmental 최종현 선대회장은 1982년 12월, 유공의 구성원들에게 혁신 비전을 제시하면서 환 경경영의 방향성도 함께 언급했다. 대체에너지 개발을 강조하면서 종합에너지 전환 을 요구했고, 더욱이 정유산업의 공해 문제를 지적하면서 정유사업의 향후 점진적 축소를 전망했다. 40년 전 그 뜻을 이어받아 SK이노베이션은 신약 개발의 인큐베이 터로, 전기차 배터리 제조기업으로 변신의 변신을 거듭해 나가고 있다. Social 최종현 선대회장의 사회적 가치 실현은 인재양성에서 그 빛이 발했다. 50년 전통의 장학퀴즈는 MBC에서 EBS로 방송사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후원을 멈추지 않았고, 광고를 통해 청소년에게 필요한 공익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특히 국가의 미래 가 인재에 달려있다고 보았고, 세계적 학자 양성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재 를 출연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Governance “나는 선경그룹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직접 결재를 하지 않고 사장 혹은 부사장에게 권한을 이양시켜 왔는데,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회장이 아무런 의사결정을 해줄 필요가 없도록 경영하는 사장을 나는 가장 우수한 사장이라고 생각한다. 유공 사장도 앞으로 수년 내에 누군가가 맡을 수 있어야 하겠다. 이것은 나의 확고한 신 념이다. 과감한 권한이양이 앞으로 유공 내에서도 전 분야에 걸쳐 이뤄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관리역량을 부단히 키워 나가야 한다.” (최종현 선대회장, 유공 간부 간담회, 1980.12)104 CHAPTER 1. RESTART 선경을 만난 유공 종합에너지·석유화학기업으로 Jump Up 1980-1996 017. 환경경영 본격화, 환경종합관리체계 구축 “세계 각국은 1970년대의 오일쇼크로 인하여 대체에너지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마 찬가지로 이러한 상황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유공을 정유회사로만 운영할 것이 아니라 종합 에너지로 그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의 정유사업은 석유가 지하자원이므로 그 사업 또한 한계가 있고 더욱이 공해문제가 뒤따르 고 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고 정유사업을 하지 말자는 것 이 아니고 계속 하기로 하되, 앞으로 10년 후에 가서는 정유사업 부문이 다른 에너지사업에 비해 그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10년 이상 계속 추진한다 면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최고의 회사가 될 것이다.” (최종현 선대회장 유공 부·과장급 간담회 발언. 1982.12.9) 유공은 최종현 선대회장의 환경 비전에 따라 ‘기업은 환경보전의 주체’라는 인식 아래 환경관리 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담조직을 갖추고 오염물질의 배출을 원천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완벽한 오염방지시설의 설치운영과 함께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폐기물을 적정하게 처리하 기 위한 생산공정의 개선과 저공해 기술개발에 매진했다. 수직계열화 완성이라는 지상과제 수행에서도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1991년 6 월 15일 수직계열화 완성 9개 신규 플랜트 합동 준공식 기념사에서 김항덕 사장은 최고 수준의 환 경관리 자신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었다. “유공은 환경문제에 있어서 단순히 ‘법을 어기지 않는 기업’의 차원을 넘어 ‘환경을 보전하는 기 업’이 되기 위해 선도적인 노력을 경주하여 왔으며, 이번에 준공된 MTBE/부텐-1 제조시설로 당사 는 공해 배출 규제가 까다로운 선진국 기준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고품질 휘발유를 생산·공급 하게 되었습니다.” 유공은 수직계열화 완성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환경경영을 더욱 강화했다. 1990년대 초반 2단 계 ‘환경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1단계(중기)로 정부가 입법예고한 환경 관련 규제 내용에 대비 하고, 2단계(장기)로 선진국의 일류 환경기업과 동일한 수준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유공은 환경 마스터플랜 수립에 따라 1990년부터 1995년까지 6년 동안 총 5,300억 원을 환경 시설에 투자했고, 2단계가 시작되던 1996년부터 2000년까지 4,250억 원을 추가로 투입했다. 종 합폐수시설과 종합소각로 시설투자는 유공 환경종합관리체계 구축의 서막이었다. 먼저 1991년 7월부터 하루 74톤 규모의 종합소각로를 본격 가동함으로써 환경친화기업으로서 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모두 100억 원이 투입된 종합소각로는 정제공정에서 나오는 폐수와 폐유 등을 처리할 수 있었다.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종합폐수시설은 1992년 5월 11일 완공, 6월부105 SK INNOVATION 60YEARS HISTORY BOOK 국내 정유사 최초로 울산CLX 내 설치된 종합폐수처리시설(1992.5.11) Next >